1988년. 친한 친구와 겪었던 사건 몇 가지. 비디오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었던 친구는 아주아주아주 멋진 남자가 나온다며 <영웅본색>을 보여줬다. 소녀들 눈에 들어온 남자는 주윤발이 아니라 장국영이었다. 국내에서 찾기 힘든 미남의 빈자리는 홍콩 스타들이 채웠다. 들을만한 음악도 늘 부족했다. 조숙했던 소녀들은 쓸데없이 진지한 걸 좋아했다. 당시 우리가 좋아하던 음악은 수퍼스타였던 박남정이나 변진섭의 것이 아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곤 했던 송시현의 ‘꿈결같은 세상’이나 푸른하늘의 ‘겨울바다’같은 곡들이었다. 자상한 남자의 사랑 노래같은 건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소녀들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해 서울올림픽보다 (초딩 수준에서) 더 화제였던 사건은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이상은의 ‘담다디’ 데뷔였다. 개구장이 소년같은 외모에 엉거주춤한 춤을 추던 이상은에게 홀린 친구는 장국영을 버리고 좀더 현실적인 존재인 이상은의 팬이 되었다.겨울에는 친구와 대학가요제를 함께 봤다. 그저그런 아마추어 발라드 곡들을 심드렁하게 듣다가 ‘무한궤도’라는 마지막팀이 연주를 시작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노래를 다시 듣고 싶어서 무한궤도가 대상을 받기를 기원했다. 이마를 반쯤 가린 신해철의 머리가 장국영의 헤어스타일과 비슷해 시각적으로 더 끌렸던 걸까? 어쨋든 나는 그날 이후로 무한궤도의 팬이 되었다. 그들은 몇 번 MBC 쇼무대에 섰고 그 시간을 위해 TV 앞을 지키는 게 초등학교 6학년 마지막 겨울방학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거금을 들여 샀던 (아마 3000원쯤이었을까) 무한궤도 1집은 내 손으로 산 첫 테이프였다. 가사를 일찌감치 다 외우고 매일매일 몇 번이고 들었다.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신기한 음악들과 선언과 맹세로 점철된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라며 소리높여 맹세를 하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라며 중학교 1학년이 상상하기엔 너무 큰 인생의 화두를 던졌다. ‘어둠 속을 뚫고 이제 아침이 오네’의 의미는 무엇인지 애매했지만 그 곡을 따라 부르는 게 좋았다. 빤한 후렴구만 반복하는 노래들이 아니었고 간주들은 화려했다. 그러니까 이 오빠들은, 그냥 가수와는 다른, 정말 멋지고 쿨한 오빠들이었다. 그들은 진지할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자들이고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시적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종류의 뮤지션처럼 보였다.빠져들지 않는 게 불가능했다.
반면 친구들은 고전 미남과는 거리가 먼 신해철을 두고 ‘이마가 넓다’ ‘키가 작다’며 투덜댔고 덕분에 우리반에서 무한궤도 팬은 나 혼자였다.(그 당시 음악 운운하며 소녀들이 좋아하던 가수는 이승철이었다) 도시락을 싸들고 서강대 철학과를 방문할 용기도 없었던 내가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소녀잡지에 실린 무한궤도의 기사들을 스크랩하는 것뿐이었다. 무한궤도 팬이 유일한 관계로 <여학생> <하이틴> <주니어>를 사는 친구들은 밴드 사진이 나올 때마다 자동으로 나를 찾았다. 스포츠 신문에 나온 기사도 심심찮게 건네받았다. 아날로그 스크랩이 애정 표현의 전부였던, 구시대 팬질의 시대였다.
기본적으로 나는 무한궤도의 팬이었고 신해철의 솔로 앨범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장르에 대한 취향이 생겼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록을 좋아하는지 뉴웨이브를 좋아하는지 그때는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듣고 싶은 노래는 ‘그런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라는 식의 노래는 아니었다. 오히려 라디오에서 만나는 신해철이 훨씬 매력적이었다.장윤정과 진행했던 10대 대상 프로그램 <하나둘셋 우리는 하이틴>을 통해 그는 말 잘하는 남자의 매력을 충분히 전달했다.목소리는 멋졌고 유머감각은 출중했다. ‘인생’과 ‘사랑’과 ‘끝’을 노래하는 음악과 달리 라디오 DJ 신해철은 밝고 명랑하고 장난기 다분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신해철과 함께 했던 내 사춘기는 부치지 못한 몇 개의 팬레터로 남았다.
가장 아끼는 편지지에 가장 아끼는 펜으로 써내려간 중학생의 애정고백은 미처 전달되지 못한 채 길을 잃었다.
고백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끝난 첫사랑처럼.
음악 취향이 생기고 새로운 음악을 찾아나서면서 신해철은 옛기억으로 남았다. 한국 음악계를 뒤흔든 넥스트 앨범을 얼마간 즐겨 듣긴 했지만 철저하게 리스너 입장이었다.낭만이 가득한 신해철의 노랫말을 따라 부르기엔 나는 너무도 시니컬하고 전투적인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주변 메탈덕들은 신해철이 나름 흥미로운 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너무 주류이고 진정성(?)이 덜해 보이는 대중적인 록을 한다는 이유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나 또한 이 무리가 된지 오래였다.
게다가 나는 홍대 죽순이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고스트 스테이션’도 들을 일도 없었다. 몇 년간 신해철과 시간을 공유하지 못했다. 그리고 1988년에서 20년이 지난 2008년, <백분토론>에서 신해철을 봤다.그는 우리가 그의 노래를 들으며 되고 싶어했을 법한 강인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독립된 개인으로 거침없이 조리있게 말하며 시선을 이끌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자신만만한 신해철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만해도 그렇게 꿋꿋한 어른이 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가늠하지 못했다. 변하지 하지 않았으니 젊은 시절 선언도 유효했다.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라며 아웃사이더의 마음을 다독이는 일도 본인이 아웃사이더이니 가능하다고 믿던 사이,그는 지하철 광고에서 학원 모델로 등장해 충격을 안겼다. 본인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했겠지만 그 이미지는 그가 지켜온 캐릭터를 풍자하는 것과 같았다. 이것 또한 거대한 농담이었을까.
6년만에 신나는 표정으로 돌아온 그를 제대로 반겨주지 못했다. 보컬의 한계를 테크닉으로 뛰어넘고 장르적 시도를 실험한 이 재미있는 앨범을 그가 죽고 나서야 들었다. 예전에 했던 것만큼 동시대적인 울림을 준다고는 말을 못하겠다. 한창 때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는 무리였을 앨범이다. 하지만 이 앨범이 ‘유작’이면 미안해진다. 녹음실에 앉아 원맨쇼를 하며 자신의 얼굴을 모자이크한 뮤직비디오가 유작이라니 말이다.이건 너무 슬픈 결말이다. 죽음을 논하던 청년이 끝에 이르러서야 홀로 녹음실에 앉아 ‘살던 대로, 하던 대로, 지가하고 싶은대로’라며 셀프 해탈을 노래한다.비판하고 선언하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던 신해철이 아닌가. ‘아따’의 뮤직비디오는 신해철이 나서서 자신의 모습을 씹어줘야 마음놓고 함께 웃으며 볼 수 있을 것같은 이미지들이다.
눈을 떳다면 무슨 말을 남기고 죽을지 한참을 고민했을 것같은 사람. 어느 소녀들의 첫사랑은 마지막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사춘기 인생의 좌표를 만들어준 은인같은 첫사랑에게 고마워할 기회도 없었다.
할로윈에 세라복을 입고 추모를 하면 해철 오빠의 취향에 맞는 추모가 될까.
웃으면서 보내주고 싶다.
잘가요, 해철 오빠.
당신이 없었다면 나의 사춘기도 없었어.
고마워.
201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