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밍 립스(Flaming Lips)의 투어 공연 중
언젠가 음악광인 C모 씨가 ‘라이브 공연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고 말을 해 놀랐던 적이 있다. 음악 좋아하기로는 어디 가도 빠지지 않는 내 동거인 또한 기본 세 시간은 서서 버텨야(!) 하는 라이브 공연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렇듯 음악에 대한 애정이 공연욕과 등치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지인들을 공연에 끌고 가야 할 때면 다소 미안해진다.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지만, 다음 날 기상하자마자 허리가 아프다든가 피곤하다든가 하는 투덜거림이 계속되면 나의 괜한 욕심 때문에 상대에게 폐를 끼친 건 아닌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반면 나란 인간은 음악에 대한 사랑을 라이브 공연을 통해 아낌없이 표현하는 쪽이다. 한국이 공연의 불모지였던 시절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라이브 클럽에 가야 속이 뚫렸다. 해외 뮤지션의 공연이라도 보게 되는 날이면, 공연에 대한 허기를 스크리밍 에너지로 전환해 2시간을 머리가 하얘지도록 소리를 질러야 만족스러웠다. 알게 모르게 많은 민폐를 끼쳤을 것이다. 나 같은 이런 열혈 공연팬 때문에 음악 감상을 하러 왔던 음악팬들이 오히려 공연 거부감을 갖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습니까, C모 씨?)
어쨌든 공연에 굶주린 채로 뉴욕에 도착해 무료 문화정보지 <빌리지 보이스>를 펼치고서 공연 스케줄 짜기에 매진했다. 일주일간 진행되는 공연 리스트만 해도 깨알 같은 글씨로 기본 3~4페이지가 넘어갔다. 수많은 공연들을 체크하고 나니 통장 잔고가 걱정됐다. ‘겨울아, 아무리 네가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공연 봐야지’의 마인드로 산다고 한들 신기하게도 언제나 0원에 수렴하는 통장 잔고였다. ‘본전’에 대한 강박이 여느 민족보다 심한 코리안으로서 어떠한 공연이든 지불한 비용 이상으로 즐기려고 최선을 다하기 마련. 뉴욕물 몇 달 먹은 상황에선,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뉴욕에서 처음 본 공연이었던 플레이밍 립스 투어 때는, 관중들이 “She Doesn’t Use Jelly”를 한목소리로 따라 부르자 역시 ‘미국 밴드를 미국에서 보니 좋구나’ 하며 감격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상이 관광객의 헛된 망상이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됐다.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작은 공연장 보워리 볼룸(Bowery Ballroom)
보통 이런 분위기다
보통 이런 분위기다2
Bowery Ballroom: 도도스(The Dodos)의 공연
몇 년 전 도도스(The Dodos)의 공연을 보던 날이었다. 멜랑콜리한 포크 뮤직을 들려주는 이 샌프란시스코 출신 듀오는 지금도 인디 씬에서 약간의 유명세는 있지만 힙한 밴드는 아니다. 마침 새 앨범을 내고 미국 투어에 나선 시기였지만 워낙 아는 사람이 적은 밴드라 티켓을 구하기는 쉬웠다. 그들 덕에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위치한 작은 공연장 ‘보워리 볼룸’에 처음 가봤다. 일찍 도착했기에 공연장 지하에 있는 바에 들러 맥주를 한잔 마셨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위층에 올라가 앞이 훤히 보이는 괜찮은 자리에 섰다. 공연이 시작되고 백 프로 집중 모드의 오오라를 뿜어내고 있을 때, 옆에서 서 있던 한 무리의 관중이 술에 취해 떠들기 시작했다. 노랫소리가 커질수록 그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술에 취한 웃음소리에 나의 음악 감상이 마구 짓밟히게 되자, 나는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며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누군가의 시야를 가리는 건 아닌지 걱정하느라 음악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야 미국 관중들이 ‘익스큐즈 미’와 함께 어디든 닥치는 대로 밀고 나가는 개매너 소유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아무튼 그때 갓 미국으로 온 나는 한없이 순진한 일개 이민자였던 것이다. ‘보컬 남자 너무 귀엽다’라며 술주정을 부리던 한 여자는 내가 옆으로 자리를 옮길수록 자기 자리가 넓어지기라도 하듯 더 자유롭게 움직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고, 급기야는 손짓 발짓을 하며 광폭하게 웃다가 내 옷에 약간의 맥주를 쏟고 말았다. ‘아임 쏘리’라고 말하는 소녀에게 ‘됐고, 닥치기나 해’라고 응대할 수 없는 나의 소심하고 예의 바른 코리언 마인드여.
이와 같은 공연 중 잡담 불상사는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발생했다. 야외 콘서트인 경우엔 더 심했다. 센트럴 파크로 대망의 M83 공연을 보러 갔던 날, 무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고 온몸으로 M83의 음악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뒤에서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듯한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알아서 멈추겠지 했으나, 이 커플은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M83이든 뭐든 지금은 너의 목소리밖에 안 들린다는 식으로 끊임없이 쫑알댔다. 이것들아, 닥치고 차라리 키스를 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이들 덕분에 몰입에 실패한 순간 사방에서 들려오는 온갖 수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라이브 음악을 바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쯤으로 생각하며 술을 마셔대는 듯했다. 아니, 이것은 공연 대국의 여유로움인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공연이든 볼 수 있는 너희와 오늘 못 보면 언제 보겠냐며 손을 부들부들 떠는 나의 차이인가?
M83의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들 @센트럴 파크
센트럴 파크(Central Park)이 섬머 스테이지에서 M83이 열심히 공연 중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미국에선 식당이 아닌 외부에서 술병을 들고 술을 먹는 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허락되는 주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뉴욕은 금지다) 야외 공연에서 술을 마시는 경험은 특별하다. 그나마 이런 경우 가격 바가지가 붙어 한 잔에 8달러가 훌쩍 넘어가니 그나마 많이 마실 수 없어 다행이다. 여느 공연장을 가든 술값은 비싸다. 그래도 기분상 한 잔은 먹어줘야 공연장에 온 기분이 난다. 게다가 뉴요커들은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말이 많은 족속들일 게다. 무뚝뚝한 인상들이지만 어쩌다 말 한번 건네면 신나서 자신의 신상명세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늘어놓는 분들이다.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이젠 약간의 노하우가 생겼다. 몇 개의 단골 공연장도 생겨 시야가 좋은 위치를 쉽게 찾곤 한다. 누군가 비집고 들어와 앞을 가리면 약하게 항의도 할 수 있고, 오히려 내가 나서서 ‘익스큐즈 미’ 하며 인파를 뚫고 지나가기도 한다(모두 그러기 때문에 지나가든 말든 그다지 신경을 안 쓰는 분위기랄까.) 무엇보다 라이브 공연을 완벽하게 감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많이 누그러졌다. 공연이 시작한 뒤에 입장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며 곡 사이사이 친구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소리를 이겨보겠다는 의지로 떠드는 분들은 여전히 용서가 안 된다. 개매너 관중을 퇴치하는 방법을 계속 연구 중이다. | 홍수경 janis.hong@gmail.com
2014.03.10
note. 10년 동안 잡지 기자로 살던 홍수경의 마지막 직장은 [무비위크]였다. 90년대 초중반, 헤비메탈의 성은(聖恩)을 듬뿍 받은 인천과 모던록의 돌풍이 불던 신촌과 홍대 일대에서 청춘을 다 보낸 열혈 음악 키드였는데, 어쩌다 보니 영화잡지 기자로 일했고, 어쩌다 보니 뉴욕에 살고 있다. 외고는 언제나 환영! 개인 블로그(69)는 여기! http://sixty-nine.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