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씨네필리아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을 기념하며 여러 사람들이 관련된 기억을 부지런히 소환 중이다. 영화를 보고 좋았던 순간을 공유하거나, 스쳐지나간 인연을 자랑하거나,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그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공개한다. 오랫동안 자국인이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왔던 감독이 그 재능만으로 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오랜 관객들에겐 기대치 않은 선물과 같다. 그 기쁨의 파도에 덩달아 휩쓸리는 동안 내 기억의 문도 열렸고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때는 1990년대 중후반. 영화가 내 세상을 지배했던 시절이다.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감독상 수상 소감이 이 기억의 문을 열였다.

“어렸을 때 영화 공부하며 계속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었는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그 말을 하셨던 분이 누구였나면, 책에서 읽은 거였지만, 우리의 위대한 마틴 스콜세이지의 말이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마티의 영화를 보면서 공부했던 그런 사람인데 같이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이고, 상을 받을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저의 영화를 아직 사람들이 모를 때 리스트에 뽑곤 했던 퀀틴 형님이 계신데, 정말 사랑합니다. 아이 러브 유. 같이 후보에 오른 토드나 샘이나 제가 존경하는 멋진 감독들인데, 이 트로피를 오스카 측이 허락한다면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서 다섯 개로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Thank you. I’ll drink until next morning.”

단편영화제에서 봤던 <백색인>과 <지리멸렬>. 영화잡지 ‘키노’에서 대대적으로 다루었던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뷔 충격.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에서 복제된 영상으로 감상해야 했던 마틴 스콜세이지의 영화들. 미국의 날카로운 독립영화와 유럽의 기이한 예술 영화들이 개봉할 때마다 비슷한 사람들이 극장에서 만났다. 나중에 하이퍼텍 나다로 바뀐 동숭시네마텍이거나 코아아트홀. 언젠가 겨울엔 <파고>를 보러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특별한 영화제에 갔었다. 돌아와서 하이텔 시네마천국에 들어가면 그 곳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걸 발견하곤 했다. 극장과 시네마테크에서 열광하던 레퍼런스들은 비슷했다. 그러던 중에 새로운 한국 감독들의 독특한 영화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한국영화라면 관심없어했던 젊은이들이 한국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박찬욱에 이어 김지운, 류승완, 봉준호, 장준환이 데뷔를 했다. 동시대 젊은이들은 그들의 데뷔작, 그 다음, 또 그다음 영화들까지 섭렵하며 동시대가 공감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한국영화는 갑자기 진화했다. 사회의식에 영화적 테크닉까지 갖춘 새로운 제너레이션이 영화판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당시 마틴 스콜세이지와 쿠엔틴 타란티노는 너무도 먼 나라의, 영화 잡지에서나 등장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책과 인터뷰를 읽고 있지만 한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쩌다 접하게된 제1세계의 해적방송같은 걸 듣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들이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 위에서 감독상을 받는 봉준호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책 속에서 존재하던 이들이 봉준호 감독과 두 다리를 거치면 연결되는 사람들이라니. 봉 감독의 선배에게 예를 다하는 수상 소감을 들으며 이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공교롭게도, 90년대 한국 시네필들의 최애이자, 예전부터 한국영화를 사랑해서 복원하고 발견해온 사람들과 함께 후보에 올랐단 말인가.

영화가 전부인 시절이 있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게 마치 인생의 사명과도 같았던. 너무 어르신같고, 꼰대같은 기억 노출이지만 그렇게 영화를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시절이 이 시점에 소환되는 건 당연하다. 봉준호는 감독상 수상 연출을 통해 자신의 멘토와 영화 동지에게 애정을 바치며 국경과 시대를 초월한 시네마 커뮤니티 무드를 만들어냈다. 마치 90년대 시네필의 길고 길었던 여정의 대단원같았다. 그의 여정은 함께 영화를 찾아다녔던 동세대 사람들에게도 어떤 정점의 순간을 공유하게 만들었다. 영화가 우리 모두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비바 씨네마. 롱 리브 더 시네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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