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넴과 제이지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내 또래가 다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내 음악 취향은 록을 기반으로 힙합이 섞여져 있다. 메탈이 끝물을 타던 90년대 초부터 팝송에 빠져들어서 모던록과 브릿팝의 부흥에 심취하는 한편, 거대한 알앤비와 힙합의 물결에도 발을 담그고 있었다. 널바나와 보이즈 투 멘을 동시에 사랑하는 차별 없는 마인드의 리스너로 성장. Warren G와 Arrested development같은 애들도 나의 올타임 훼이보릿이란 말이지. 그리고 나서 일렉 폭풍을 맞이하여 잡다구리한 취향을 가지게 됐다. 결론은 장르 상관 없이 좋은 음악이 좋은 음악. 그러므로 섭템버에는 닥치고 지풍화 형님들의 ‘섭텝버’를 들어야 한다는 결론.

각설하고, 유니버설뮤직의 협찬으로 일찌감치 솔드아웃된 에미넴과 제이지의 ‘Home and Home tour’를 보러 양키즈 구장에 도착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우박으로 공연 보러온 몇 만명의 관중이 혼란에 빠지는 상황이 발생. 운좋게 5불에 우비 사고 좋아라 하다가 곧바로 비가 그치는 바람에 투덜댔으나, 이게 몇 시간 뒤 거대한 삽질의 암시임을 깨닫지 못했다.
엄청난 인파가 웅성대는 검색대를 빠르게 통화하고(양키즈 구장 입장시 경찰 검문은 필수) 안에 들어서니 거대한 규모의 경기장이 펼쳐졌다. 그리고 핫도그, 피자, 샌드위치, 햄버거 등의 상점과 수많은 맥주 가판들. 양키즈의 특별한(그러나 별로 보잘 것 없는) 플라스틱 컵에 따라주는 생맥주가 10불. 그냥 병맥주가 9불이라는 놀라운 바가지 가격. 그러나 이미 취한 혈기왕성한 분들의 고성방가가 간간히 들려 오고.

공연 시작전 우리자리 쪽, 공연 시간인 7시 30분이 되었는데 좌석 채워진 게 이 수준. 규모를 간략 비교하자면, 필드 쪽 좌석수가 체조경기장 만하다고 보면 된다. 양키즈 구장은 10만명을 수용.

요즘 Nothin’ on you로 뜬 B.O.B가 오프닝. 차트 1위하는 신인가수도 열악한 음질로 오프닝을 해야 하는 군기 개념의 힙합 세상. 비오비라고 알파벳으로 읽지 않고 한국스러운 친근한 닉네임이라며 우리끼리 ‘밥군’이라 불렀다. 근데 이 분이 재범이랑 친하다는 같이 간 친구의 코멘트.

에미넴이 나오기까지 내가 에미넴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몰랐다. 마약중독 재활하고 정신차린 뒤 ‘recovery’란 너무 솔직한 제목의 새앨범을 내놓고 첫 투어. 제이지와 함께 하는 이 투어는 에미넴 고향인 디트로이트에서 두 번, 제이지 고향인 뉴욕에서 두 번만 진행됐다. 에미넴은 바로 전날 열렸던 mtv 뮤직 비디오 어워즈에 참석하고 바로 뉴욕으로 날아온 듯. 리아나랑 시상식에서 보여준 공연도 멋졌음.

구찌로 깔맞춤하고 에미넴 맞으러 온 뉴욕 출신 50센트. 불 꺼지면 야광으로 실루엣이 보이게 제작한 옷이였는데 진정 촌스러워서 안타까웠다. 오빠, 명품 좀 밝히시는 듯. 그나저나 에미넴의 무대복은 검은 셔츠와 검은 반바지와 검은 캡이 전부.

내가 공연에서 제일 좋아했던 부분. 닥터 드레의 우정 출연. 옛날보다 살은 빠졌고 근육이 늘은 듯. 에미넴, 50센트와 함께 ‘Nothing but a G thing’을 부르는데 추억의 눈물이 흐를 뻔 했다. 생각보다 어렸을 때 힙합 좀 들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에미넴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노래는 신곡인 ‘not afraid’와 앵콜곡이었던 ‘lose yourself’. 그 모든 곡을 영어로 떼랩하는 관중들이 놀라울 뿐이고. 나의 공연인생사상 떼랩은 또 처음이네요. 에미넴의 특징은 절대 웃지 않는다는 것. 정말 심각하게 모든 곡을 래핑. 그리고 인사에는 모두 ‘마더퍼킹’이 수식어. 한국말로 옮기자면, ‘졸라 뉴욕, 졸라 좋냐?’ 뭐, 이런 거. 뒤에서 연주하는 밴드 멤버들이 모두 흑인이란 점이 흥미로웠다.
에미넴의 1시간 반 공연이 끝나니 11시. 제이지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퀸즈 거주민 신데렐라의 통금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

제이지 공연 시작되기전 카운트다운. 그만 처묵처묵하고 자리에 앉으라는 의미. 관중밀도는 대략 이랬음.

뉴욕커 제이지의 등장. 브룩클린 출신으로 Notorious B.I.G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며 친분을 쌓았다. 근데 이 오빠도 어렸을 때는 드럭 장사 좀 하셨음. 그러나 이제는 세계적인 갑부.

동행인과 이제 카니예 웨스트만 보면 되겠네, 하고 있었는데 진짜 카니예 웨스트가 등장했다. 레드 수트에 레오파드 셔츠, 그리고 거대한 시계 금목걸이 착용하고 제이지와 랩랩랩. Run this town의 자기 피처링 파트를 열랩. 이분은 요즘 자기 블로그에서 금요일마다 신곡을 하나씩 푸는 떡밥 프로모션 중. 그중 하나인 Monster를 제이지와 함께 했는데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현란한 무대였다. 그런데 카니예, 제이지에 비해 랩이 좀 딸리는 거 같아연. 그래도 Good night을 불러줘서 좋았음. 현재 첫싱글 runaway도 무료 다운로드 가능.(그전날 mtv 시상식 마지막 무대에서 공연한 runaway는 많이 썰렁했다)

제이지와 에미넴이 친한 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둘은 이상한 프로젝트 앨범 ‘Renegade’를 발표했다. 앨범 중심의 공연인 줄 알았는데 결국 두 사람 각자의 콘서트를 하루에 엮어 하는 방식이었다. 에미넴과 제이지가 한 무대에 선 건 같이 한 곡 ‘Renegade’를 부를 때 뿐이었다.

제이지를 환호하는 시그너처 액션. 저렇게 손짓을 하면서 Hova라고 외친다. 뉴욕커라면 다 알고 있는 것인 듯. 나는 어쩌다 학원에서 배웠음.

디트로이트에서 단촐하게 공연을 끝낸 제이지는 뉴욕 공연의 호스트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 엄청난 게스트들을 데려 왔다. 그 중 한 명이 콜드플레이의 크리스 마틴. 어찌하여 그가 뉴욕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제이지의 소개에 수줍게 등장. 몇 곡 피아노 연주를 하고 홀로 썰렁하게 Viva la vida를 불렀다. 그래도 관중들이 떼창을 해줬으니 외롭지는 않겠고. 크리스 마틴은 이 날만 깜짝 출연했다. 정말 깜짝 놀랐음.

또 하나의 깜짝 게스트 비욘세. 동행인은 “친구 자랑질 하더니 결국 마누라 자랑까지 한다”고 평가. 제이지 음악의 팔할은 남들과 함께 만든 것인가. 이외에 또 다른 차트 1위 신인 래퍼 드레이크도 잠깐 나왔었다. 시간이 갈수록 제이지 공연보다 게스트에 더 관심 집중. ‘Empire state of mind’를 부를 때 혹시 알리시아 키스까지 오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은 객원 보컬이 등장. 어쨌든 현재 최고 뉴욕 찬가인 이 노래는 뉴욕커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놓고. 이 노래 듣고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서기 시작하자 뭐라 하며 다시 흥을 돋우는 제이지. 그러나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는데. 예전에 친구가 리아나 공연 보러 갔다가 끝이 안 나서 지쳐 돌아왔다는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진정 흑인 분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노는 것임?
이건 뭐 공연이라고 왔는데 알고 보니 힙합 페스티벌. 5시간 동안 랩만 들었더니 1년 들을 힙합을 다 들은 기분.
제이지나 에미넴이나 록과 똑같은 백밴드 구성을 하고 있어서 어쩔 때는 록음악에 랩이 끼어있는 듯한 느낌도 들더라.

1시 넘은 시각에 지하철은 좀 위험한 지라 기차를 타기 위해 맨하탄으로 내려왔다.(양키즈 구장은 브롱크스 위치) 그러나 다음 기차는 3시 반. 역 안에 자리잡고 주무시는 홈리스들을 가로지르며 결국 지하철을 타기로 결심.(뉴욕 지하철은 24시간 운행) 더딘 지하철을 타고 종점에 도착하니 3시. 한국 콜택시를 부르려고 했더니 전화를 안 받아서 결국 1시간에 한 대 있는 버스를 기다려 결국 4시에 집에 귀가하는 사태 발생. 머릿속에선 계속 에미넴의 I’m not afraid가 반복되고 있고. 그래 나는 두렵지 않았어요.

201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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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뉴욕 아시안영화제 프로그래머 인터뷰

옛날 옛적 뉴욕, 다섯 명의 홍콩 영화 마니아가 있었다. 홍콩 영화를 보여주던 극장이 문을 닫자 그들은 ‘서브웨이 시네마’란 조직을 만들고 1000달러씩 출자해 ‘두기봉 회고전’을 준비했다. 폴 카제, 브라이언 나스, 고란 토팔로비치, 냇 올슨, 그레이디 헨드릭스. 아시아인은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아시아 영화, 특히 액션 영화를 너무도 사랑했던 이들은 2001년 ‘뉴욕 한국 영화제’ 진행을 발판 삼아 2002년 ‘뉴욕 아시안 영화제(NYAFF)’를 개최했다. 영화제라고 하지만 5개국에서 온 11편의 영화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점점 아시아 영화 오타쿠들의 성지로 거듭나고, 박찬욱이나 미이케 다카시, 스즈키 세이준 등의 영화가 첫 소개가 되면서 점차 뉴욕의 필수 구경거리로 자리 잡아갔다. 주요 거점은 다운타운의 IFC 센터였으나(마더와 놈놈놈이 여기서 단관 개봉) 올해는 부티 나는 업타운의 링컨센터 극장으로 이동,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됐다.
무턱대고 취재하겠다고 이메일을 보냈는데 모두들 친절하게 맞아줘서 대감격. 올해 초점은 ‘홍콩 뉴 액션 시네마’와 ‘일본 언더그라운드 시네마’였다. 엄청난 발견의 의지를 다지는 영화제는 아니고 그냥 재미있게 놀자는 게 목표. 그 가벼움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한국영화는 <여배우들> <김씨표류기> <의형제>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 <작은 연못> <과속 스캔들> 등이 초청. 이재용 감독과 이해준 감독, 그리고 작년 최고 단편 <남매의 집>의 조성희 감독이 뉴욕을 찾았다.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쪽을 주로 담당한다는 프로그래머 고란 토팔로비치를 만났다. 서브웨이 시네마를 만든 5인 마니아 가운데 이제 남아있는 오리지널 멤버는 고란과 그레이디 두 명이다. 다른 두 명의 멤버들이 더 있고, 그들과 몇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게스트 관리부터 선물 이벤트까지 모든 걸 다 알아서 한다.
긴장을 많이 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고란은 굉장히 친절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물며 2MB라는 고유명사까지 알고 있어 깜놀. 20분을 예상했던 인터뷰는 예상 외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1시간 20분 동안 이어졌다.(사실 20분은 나의 더듬거리는 영어 스피킹 때문이었다) 영어 녹취를 풀고난 뒤 고작 잡지에 들어간 분량은 반의 반도 안되는 상황. 영어 녹취에 들어간 노력이 아까워 블로그 공개하기로 결심.
무엇보다 요근래 나눴던 어떤 한국영화 수다보다 더 생산적인 대화였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심플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을 왜 우리는 ‘열심히 하지만, 아마 우린 안 될 거야’라고 몰고 가고 있었던 걸까.
아무튼 영화제와 인터뷰를 겪고 난 모든 결론은. 와이 소 씨어리어스? 영화는 즐거울려고 만든 거 잖아요. 안 그래?

친구 디자이너가 리미티드로 만들었다는 KISS와 김동지의 믹스 티셔츠. 이해준 감독은 티셔츠 탐나는데 만약 입고 입국하면 잡혀갈 거 같다고 했다

– 링컨 센터로 오면서 달라진 점은?
규모가 커지다 보니 아무래도 일이 더 많아졌다. 서브웨이시네마가 영화제를 시작했을 때 기본 컨셉은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를 관객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마치 친구들에게 엄청나게 재미있는 영화가 있다며 추천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초점은 오로지 관객에 대한 것이다. 레드카펫이나 영화산업 관계자들은 우리의 관심 밖이다. 흥미롭고 독창적인 열정들을 공유하고 훌륭한 영화들을 관객들에게 소개해주려고 노력한다. (아시아인이 아무도 없어서 놀랐다) 미국의 아시아 영화팬들이 꼭 아시아인일 필요는 없지 않나. 70~80년대 홍콩영화들, 그리고 구로자와 아키라나 오즈 야스지로가 만든 일본영화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빅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라고 권하는 셈이다. 물론 차이나타운에 가서 dvd를 사거나 인터넷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지만 그러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생각을 공유할 기회가 없다. 게다가 우리는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들을 만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작년에 우리는 스타 아시아 어워즈를 만들었다. 매년 영화를 보면서 주목할 만한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을 여기로 데려와서 좋은 시간을 나누고 싶었다. 작년에 소지섭과 공효진이 온 게 시작이다. 올해는 홍금보와 임달화, 황보가 왔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분들이고 모셔올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런저런 행사 때문에 일은 더 늘어났다. 우리는 원래 작게 시작한 영화제였는데 이제는 뭔가 관리해야 하는 게 많아졌다. 스트레스도 많긴 한데 그러나 관객들이 와서 영화를 즐기고 좋은 시간을 보낸다면 모든 게 괜찮다.
– 관객은 늘었나?
확인해봐야 한다. 늘었기를 희망한다. 업타운으로 왔고 링컨 소사이어티 멤버도 관객으로 참여하면서 수치가 늘어났을 것이다. 지난해까지는 ifc 센터가 거점이었다. 저팬 소사이어티가 합류하면서 지난 두 해 동안 11000명 정도를 유지했고 그 숫자가 우리가 데려올 수 있는 최고 많은 관객인 것같다. 그 숫자를 유지할 수 있어 자랑스럽다. 링컨 센터로 왔으니 더 많은 관객들이 즐겼기를 희망한다. 지금까지는 굉장히 긍적적이다. 사실 다운타운 분들에게 사과를 드리고 싶었다. 옮겨오는 바람에 불편을 드렸는데, 그들도 변함없이 영화를 보러 왔기를 희망한다. 한편으론 링컨 소사이어티 센터로 오면서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좀 더 젊은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리컨 센터와 관객층의 변화, 좋은 결합이라고 생각한다.
– 언제부터 한국영화 쪽을 프로그래밍해왔나?
사실 우리는 의견 일치를 통해 프로그램을 선정한다. 우리는 모든 영화를 본다. 빅 스크린 TV에 팝콘과 맥주를 갖추고 같이 볼 때도 있고 각자 알아서 볼 때도 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한 팀으로 영화를 선정한다. 그런데 영화 편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각 지역 영화사들과 연락할 담당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내가 한국을 담당하고 있다. 그레이디는 보통 홍콩을 담당한다. 마크는 도쿄 필름 엑스과 연락하고 자주 도쿄를 오가며 네트워킹을 한다. 우리는 서로 어떤 영화가 있고 어떤 영화에 주목해야 하는지 계속 정보를 교환한다. 그러나 그건 ‘담당’일 뿐이다. 프로그래밍은 모두 함께 한다.
– 그러면 어떤 기준으로 영화를 선정하나?
기본적으로는 각자의 취향에 기반한다. ‘이 영화 좋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들이다. 물론 한 영화를 모두 다 좋아하지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심볼>은 그레이디와 나는 좋아하지만 정작 일본을 담당하는 마크는 싫다고 했다. 우리는 언쟁을 하기도 하지만 감독이 추구하는 스타일에는 수긍을 한다. 할리우드 영화와 다르게 아시아 영화들은 여전히 어른을 위한 멋진 장르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는 기본적으로 어린이들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아이언 맨 2>같은 영화를 즐길 수도 있지만 때로는 좀 더 지적이고 복잡한 어른 영화가 그리워진다. 아시아 영화는 즐거우면서도 지적이다. 나는 현대 아시아 영화들이 그런 균형을 잘 맞춘다고 생각한다.
– 잠깐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뉴욕에 오면 더 다양한 영화를 보게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 물론 미국 영화는 다양하다. 하지만 유럽이나 아시아 영화를 보는 건 정말 쉽지 않다.
미국의 수입영화 산업은 엉망이다. 미국의 해외 배급 시스템은 다 무너졌다. 영화사는 돈이 되지 않으니까 해외 영화를 배급하지 않는다. 몇 가지 예외가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 DVD, VOD, 케이블 TV 그리고 ifc 극장같은 곳에서 외국 영화들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영화들은 특징이 있다. 미국에 배급되는 아시아 영화는 두 가지 경우 뿐이다.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브랜드 가치가 있는 감독의 영화들이거나 한편에는 장르 영화가 있는데 특별히 액션이 인기다. 호러 도한 미국에 팔기가 수월하다. 예를 들어 <김씨표류기>는 훌륭한 영화이지만 미국에 배급될 기회가 없다. 정말 불행한 일이다. 우리는 영화제를 통해 아시아 상업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스펙트럼을 보여주길 원한다. 블록버스터부터 언더그라운드 영화까지 말이다.
– 판타스틱 영화제 네트워크에 속해 있던데 NYAFF는 장르 영화를 더 좋아하나?
NYAFF는 기본적으로 장르 오리엔테이드 영화제다. 우리는 아시아 영화에 대한 편견을 바꾸고 싶다. 영화제든 극장이든 소개되는 영화제는 거의 예술영화들이다. 그게 꼭 나쁘진 않지만, 알다시피 대개는 지루한 영화들이다.(^^) 아시아는 그보다 많은 영화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즐거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 그 영화들은 대개 웰메이드이고 연기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영리한 장르 메이킹을 보여준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장르 영화제이지만 우리가 아니면 미국에 소개될 수 없는 좋은 영화들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작년에 와카마츠 코지의 <유나이티드 레드 아미>는 3시간짜리 영화였는데 그건 장르 영화가 아니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 영화가 마음에 들어서 관객들에게 권해줬다. NYAFF는 장르 영화제이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가 있으면 그게 장르 영화든 아니든 상영을 고려한다.
– <작은 연못>을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인가?
그렇다. 하다 못해 그 영화는 다른 한국 영화들과도 다르다. 한국영화는 비극적인 역사를 다룰 때 너무 멜로드라마틱하게 가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렇게 만든 영화들이 성공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화들은 미국 관객들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다. 미국 관객들이 너무 시니컬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다지 효과가 없다. 그런데 <작은 연못>은 신선했다. 일단 멜로드라마가 아니었다. 인물을 소개하는 첫 부분은 너무 아름답다. 그러나 빠르게 비극이 일어나고 그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런 점이 정말 좋았다. 연극 감독의 첫번째 영화였는데 소재를 잘 다뤘다고 생각하고 나에게는 정말 신선했다. 마치 후 샤오시엔의 영화를 보는 거 같았다.
– 선정을 위해 얼마나 많은 한국영화를 보나?
꽤 많은 영화를 봤다. 아마 개봉된 한국영화들을 거의 다 봤을 것이다.이제는 한국영화 제작 진행에 대한 레이더를 가지고 있다. 여전히 독립영화 정보는 쉽지 않은데 여러 친구들이 추천을 해주기도 한다. 부천과 부산 영화제 상영작도 체크하고 때로는 전주 영화제도 살펴본다. (전주? 그쪽은 취향이 많이 다를 텐데?) 전주 같은 경우 흥미로운 영화들이 있다. 전주 덕분에 <우리는 액션배우다>같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정기적으로 영화 회사들과 접촉하면서 계속 정보를 업데이트 하고 있다. CJ, 쇼박스, 엠라인, 화인컷, 인디스토리 등등. 물론 모든 영화를 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
– 영화제가 끝나고 나서부터 계속 네트워킹을 하나?
10월에 부산영화제를 갈 것이다. 부천영화제는 가고 싶은데 딱 그 시기에 세르비아에서 어머님이 방문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갈 수가 없다. 베이징 쪽도 살펴볼 것이다? (베이징?) 지금 중국 영화계가 급성장 중이라 뭔가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중국 영화는 여전히 안보 문제가 걸려 있어서 쉽진 않다. 올해 <소피의 선택>같은 상업영화와 <천안문> 다큐멘터리가 섞여 있다. <천안문>은 심각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요소가 있다. 제작 품질도 훌륭하다. 천안문 사태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 빅스타들이 모여서 모택동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런 게 바로 프로파간다 영화 아니겠나. <천안문>은 그에 비해 훨씬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멋진 영화다.
– 한국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들려준다면? 요즘 뉴욕에선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많이 사그라들었다고 들었다.
한국영화는 지속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느리게 다수에게 다가가고 있다고 느껴진다. 한국영화를 미국에 소개하는 데 가장 어려운 부분은 마케팅적 측면이다. 예를 들어 홍콩 영화하면 액션이고, 일본 영화도 사무라이나 아이돌 같은 특징이 있다. 그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명확한 컨셉을 주고 있고 그래서 팔기가 더 수월하다.그런데 한국은 좀 다르다. 전체적인 한국영화가 아니라 감독 개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누군가는 박찬욱, 누군가는 봉준호, 누군가는 김지운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매그놀리아 영화사는 모든 봉준호의 작품을 모으고 있다. 그건 라이브러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특별한 감독들에게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도대체 한국영화가 무엇인지 캐릭터라이징하기가 쉽지 않다. 또다른 이슈는, 미국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더 익숙하다. 그러나 한국에 관해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전쟁’을 떠올린다. 그러나 계속 고정관념을 바꾸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세계 무대에서 여전히 젊은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 세대의 다음 무대가 기대된다. 독립 영화, 힙합 컬처, 비디오 아티스트 등 여러 분야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해나간다면, 그들은 한국의 과거에 대해 그렇게 많이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들의 비전은 좀 달라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여러 방식으로 더 글로벌한 관객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음 세대 한국 감독들이 무언가를 해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 미장센 단편 영화제 상영작들을 소개하는 건 그런 맥락인가.?
지금 4년째 미장센 상영작들을 소개하고 있다. 원래는 한국 문화원 쪽에서 단편영화제를 틀었으면 좋겠다는 제의가 있었다. 그 중에 미장센 영화제가 장르 쪽이라 우리와 맞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한국 단편 영화들을 많이 봐왔다. 2년 전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단편영화 심사위원이었고 아시아나 단편영화제에서도 심사를 했다. 수많은 영화들을 보며 그때 깨달은 것은, 애니메이션이 정말 훌륭하다는 점이다. 실사 영화들은 그다지 좋진 않았다. 단편 감독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 한편에 담아야 한다는 상박이 너무 강했다. 아마 그 영화가 영화계 일자리를 위한 도구가 되기 때문인 거 같다. 품질은 그리 좋진 않았지만 젊은 세대는 흥미로운 것들을 자유롭게 담아내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나중에 누가 좋은 감독이 될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이번에 온 <남매의 집>은 정말 수작이다. 긴장감도 있고 잘 조율된 단편영화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너무 길다고 불만이었지만 나는 그 영화가 올해 최고 선정작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는 최근 장편을 끝냈다) 알고 있다. 돌아 가면 복사본을 보내준다고 했다.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한국에서는 왜 장편 애니메이션을 안 만드나? 훌륭한 인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
– (질문에 급당황) 음,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 대개 아이들을 위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애니메이터들은 어른이 좀 더 보기 쉬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한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해외와 협동 작업을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다. 나는 애니메이션이 한국 영화의 또 다른 무기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면, 수익을 오로지 현장 판매에만 기댄다는 것이다. 그 수익은 그리 크지 않다. 한국에서 DVD 시장이 무너졌지 않나?
– (세컨트 임팩트 급당황) 음…우리는 인터넷 발전에 적응하지 못했다…렌탈 시장에서 바로 무료 다운로딩으로 넘어가 버렸다. 사실 한국에서는 영화를 산다는 게 습관이 되지 못했다. 그전에도 사람들은 오로지 ‘대여’로만 영화를 봤다. 그것도 그리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 영화는 공짜라고 생각한다. (화제 전환) 나는 매년 부천영화제를 갔었는데 이제 그럴 수 없어 안타깝다. 대신 NYAFF가 생겨 다행이다. 그런데 <시>는 이 영화의 취향이 아닌가?
음, 우리는 가져올 수 없었다. 가을에 하는 뉴욕영화제에서 상영될 거라고 확신한다.
– <하녀>도 올지 모르겠다. 지인들이 그 영화는 재앙이라고 하더라.
<하녀>는 김기영 외에 누구도 만들 수 없는 영화다!
–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는 무엇인가? 아마도 가장 어려운 질문일 것 같다.
음…(한참 생각) <살인의 추억>을 좋아하고…이명세 감독의 작업을 좋아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도 좋고 <형사>는 과소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상업영화인데도 아주 독특했다. 모든 이미지가 음악에 딱 붙어 있었다.

– 모두 <형사>를 비웃곤 하지만 요즘 사극을 보면 <형사>의 영향이 느껴진다.

<형사>는 아마 향후 20년 동안 영감을 준 영화로 언급될 거 같다. 김지운 감독은 이전 영화들이 좋다. 그는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지면 실패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작은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놈놈놈>은 재앙이었다. 스파게티 웨스턴과 만주 웨스턴 양쪽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나쁜 것 중 하나는, 사소하지만, 미술이 과도하게 깨끗했다. 그 미술은 더 더러워야 했다.

– 처음 듣는 의견이다. 흥미롭다

비슷하게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 곳에>의 수애도 더운 베트남에서 항상 완벽한 메이크업을 유지하고 있어서 신기했다. 사실 오래된 영화들을 더 좋아한다. 요즘 영화보다 훌륭한 영화들이 많다. <서울의 지붕밑> <팔도 사나이>가 좋다.(한국 제목을 찾기 위해 그의 새로 산 ‘드로이드’가 동원됐다) <장국의 아들>과 <무협검풍>은 좋아하는 액션영화들이다. 한국의 수작 액션영화들을 보면 홍콩영화와 일본영화뿐 아니라 제임스 본드같은 서양 문화의 영향이 동시에 느껴져서 흥미롭다. 한국 액션영화만의 특징이 있다면 영웅 캐릭터다. 영웅은 스스로 노력해서 영웅이 됐다. 초라한 과거, 길거리 시절, 그리고 홀로 단련 시절을 거쳐 승자가 된다. 홍콩영화들은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있어 항상 훈련 신이 등장하지만 한국 액션영화는 그렇지 않다. 박중훈이 나오는 <바이오맨>에서 영웅은 터미네이터와 람보의 중간 캐릭터였다. 아마 프로듀서를 애니메이터가 하지 않았나? (나중에 확인하니 김청기) 박중훈은 아마도 그 영화를 싫어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바이오맨>을 우리 영화제 심야상영작으로 소개하고 싶다. 아마도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다.

– <전우치>는 봤나?

봤는데 별로였다. 초청을 계속 고려해봤지만, 솔직히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지 않았다. 액션은 익사이팅하지 않고 지루했다. 처음 부분은 기대할 만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망스러웠다. 나는 그 영화가 한국의 전통적인 이야기라는 것에도 흥미있었고 정말 기대를 갖고 봤는데..미안하다..선택할 수가 없었다. 아, 지금 생각났는데 <메멘토 모리>도 좋아한다. 한국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던 거 같다. <김씨표류기>도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미장센과 이야기는 굉장히 한국적이지만 현대의 인간과 도시, 문명. 현대 커뮤니케이션 등에 대한 훌륭한 코멘터리이다.(나중에 고란은 좋아하는 영화에 <작크를 채워라>와 <아가씨 참으세요>를 추가했다)

– (지난 카탈로그를 들춰보다 딴 이야기) <새드 베케이션>은 좋은 영화였다
오다기리 죠와 아사노 타다노부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너무 바쁜 배우들이라 불가능했다.

* 갑자기 나타난 영국의 장르 영화 잡지 <IMPACT>의 기자. 다음 상영작인 <적벽대전 언컷>을 보러 왔다. 얼떨결에 인사하고 둘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 봤어? 괜찮아?”
“나쁘지 않은데 만화책이 더 훌륭한 거 같아.”
“만화책? 만화가 원작이야?”
“만화 제목이나 원래 영화 제목이 ‘Like the Moon escaping from cloud’으로 훨씬 시적이야.”
“엥? 근데 제목이 왜 ‘Blades of blood’야? 그게 훨씬 멋지구만.”
“나도 모르겠어. 아마도 세일즈 회사에선 그게 더 잘 팔릴 거 같았나봐.” ”
“나는 <라디오 스타> 좋아해. 정말 따뜻하고 기분 좋은 영화였어. 배우들이 이전에 함께한 경험이 많아서 정말 즐겁게 연기를 했고. 안성기 연기는 정말 훌륭했어.”
“이준익은 <님은 먼 곳에>를 제외하고 좋은 영화를 만들었어.”
“그거 ‘blades of blood’에 대한 좋은 뉴스인 거지? 아, 그리고 나 <쌍화점>을 봤는데, 눈은 즐거운데 호모포빅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 연기도 좋고 액션도 익사이팅했거든. 근데 호모호빅이 계속 걸리더라고.”
“우리도 <쌍화점>이 즐거우면서 심각한 시대극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영화제에 소개하고 싶었는데 영화사가 토론토에 가야 한대. 뭐, 행운을 빈다고 했지. 근데 결국 그 영화는 아무데도 가지 못했어.”
“국내에선 잘 됐데?” (동시에 나를 쳐다봄)
(써드 임팩트급 당황) “아, 뭐, 잘 안 됐어. 관객들은 대부분 그 영화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어.”
(고란) “그러니까. 그게 우리 영화잖아! 맥주와 팝콘을 들고 보는 영화라고. 우리 영화라고.”
(임팩트 기자) “그래서 나도 편하게 보려고 했는데. 도서관에서 어린 남자의 정사를 목격한 왕이 게이 사이코 몬스터가 되잖아. 나는 그때 너무 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다음부터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었어.”
(고란, 나를 보며) 한국의 어떤 프로듀서들은 자기 영화의 포지셔닝과 마케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 비현실적이랄까. 되지도 않은 영화제를 생각하니까. 영화제도 나름의 과정이 있다. 어떤 영화제에서 소문이 나면 특정한 서킷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개는 기회를 잃는다. 우리는 북미 판타스틱 영화제 네트워크이고, 다른 영화제들이 더 국제적이고 더 아시아 친화적이라고 해도 우리도 유사한 프로그래밍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선택하고 추천하면 그 영화는 북미 영화제 서킷을 돌 수 있다.

인터뷰 후 다시 일로 돌아간 고란씨 THANKS!

Blur와 중년팬의 각오

2003년 [Think Tank] 앨범이 블러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데이먼 알반은 기억도 잘 안 나는 프로젝트들을 작업하며 생존 소식을 알렸지만 예전만큼의 인기를 얻진 못했다. 작년에 나온 솔로 앨범도 별로였다. 흑인음악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며 거기에 아기자기한 일렉트로닉 비트와 노이즈를 얹는 그의 방법론은 좋게 말해 ‘고릴라즈’의 B트랙 모음 정도로 들렸다. 그러니 블러가 재결합을 해서 새 앨범을 낸다고 했을 때 그리 큰 기대를 하진 않았으나 싱글 ‘There are too many of us’를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 [13]과 [Think Thank] 시절 블러 식의 멜랑콜리 팝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는 곡이었다. 냉소와 풍자로 무장한 쿨하디 쿨한 음악을 들려줬던 청년들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팝 멜로디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데 집중하다가 휴지기를 맞이했다. 돌아온 음악은 이전 ‘블러’를 모두 섞은 사운드에 회한에 정서를 더하고 지금의 테크놀로지로 마무리한 듯한 사운드였다.블러가 블러인 것이 가장 힙한다는데 모두 동의라도 한 걸까. [Magic Whip]은 힙한 중년 밴드가 되기 위한 노력이 돋보이는 앨범이다. 물론 그 포지셔닝은 스스로가 아니라 청자들이 판단할 일이겠지만.

블러가 선택한(혹은 강요당한) 첫 프로모션은 5월 1일 앨범 발매와 함께 뉴욕 브룩클린의 작지만 유명한 공연장 ‘뮤직홀 오브 윌리엄스버그’에서 무료 공연을 갖는 것이었다. 티켓마스터 사이트에서 선착순으로 배부되는 티켓을 건지기 위해 예매 개시 시간이 되자마자 부지런히 마우스를 클릭하며 티켓 한 장을 얻는데 성공했다.5분도 안 되어 티켓은 모두 사라졌다. 블러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이렇게 예매에 매달릴 줄이야!

공연장 밖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티켓을 구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남는 티켓 없냐?”고 물었다. 돈을 내고 사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딜을 제시하건 티켓을 넘기는 사람은 없었다. 팬덤 강한 유명한 인디밴드가 수시로 공연하는 곳임에도 이 정도로 줄이 늘어선 게 흔치 않은 풍경인가 보다. 5분 간격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누구 공연이냐고 묻는다. 신기한 건 ‘블러’라고 말하면 대부분 누군지 안다는 것.

“이거 무슨 밴드 줄인가요?”

“블러요.”

“응? 트리뷰트에요?”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빵 터졌다. 옛날 밴드의 해체 소식만 기억하고 있던 행인인가. 아니오! 우리는 오리지널 블러를 보러 왔소!

5시 입장이란 공지와 상관없이 공연장에 들어가니 시간은 6시가 훌쩍 넘었다. 무대 위에서 초어린 오프닝 밴드 ‘Honduros’가 발랄한 펑크 뮤직을 연주 중. 키 큰 남자들이 많아 자리를 이리저리 옮기고 있던 중에 한 청년이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에서 왔는데 뉴욕 살아요.”

“블러 공연 본지 얼마나 됐어요?”

“음, 그게 90년대였는데. 한국에서요.”

“……(잠시 침묵) 아. 저는 고릴라즈를 좋아했어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했었죠. 블러는 본적이 없어요. 고릴라즈 좋아해요?”

“그럼요.좋아했죠. 작년에 데이먼 알반이 솔로 앨범 내고 거버너스 볼에서 공연했는데 그때 고릴라즈 노래 몇 개 불렀어요.”

“아, 작년에 데이먼 알반이 앨범 냈어요? 몰랐네요.”

돌아서서 잠깐 연도를 따져봤다. 고릴라즈를 2000년대에 봤다는 사람에게 무려 블러를 90년대에 봤다고 했으니 우리의 나이 차는 열살 이상? 우악. 말 실수를 했어. 연식을 들켰다! 얘야, 미안하다. 내가 좀 동안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90년대에 블러를 좋아했을 법한 비슷한 나이 대의 분들도 보였지만, 아주 놀랍게도 꼬꼬마 소년들, 그러니까 소녀가 아닌 소년들이 꽤 많이 눈이 들어왔다. 고릴라즈를 좋아했다는 내 앞 청년은 그나마 나이가 든 축에 속했다. 멤버들이 비교적 잘 보이는 앞쪽으로 나아가니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분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뭐지? 블러가 힙한가? 공짜 공연이라서 그런가? 그런데 어쩌자고 내가 이렇게 앞쪽 좁은 자리에 서 있는 거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도 자랑스러운 블러 팬이란 말이다.

마침내 블러 멤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을 때, 잃어버렸던 가족과 20년만에 상봉하면 이런 느낌일까 싶게 가슴이 벅차 올랐다. 멤버들에 대한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웰컴 백”이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데이먼 알반은 멋쩍어하는 동시에 그 환호를 즐기며 계속 더 하라는 식으로 양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나름 유머러스한 인사를 건넸다.

“굿 이브닝. 앨범을 안 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데서 공연하는 건 처음이야!”

‘블러’로 재결합 후 첫 앨범, 그리고 발매날 첫 공연. [Magic Whip] 앨범 첫 곡 ‘Lonesome Plant’의 발랄한 전주로 공연이 시작됐다. 명백한 블러식 팝/록 사운드, 그리고 변함없는 데이먼 알반의 목소리. 그레이엄, 알렉스, 데이브 모두 나이는 좀 들었지만 예전 얼굴이 남아있다. 나이에도 서슴지 않고 무대 위에서 깡총깡총 뛰는 데이먼을 제외하고 나머지 멤버들은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연주에 몰두했다. 드러머 데이브는 ‘I broadcast’ 후주에서 드럼을 두들겨 부술 듯한 열정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레이엄은 앨범보다 더 과장된 노이즈를 만들어내는데 열심이었다. 격정적으로 기타를 연주하던 그는 땀에 젖어 안경을 벗어버렸다. 오로지 알렉스만 차분한 모습으로 묵묵히 베이스를 연주했다. 데이먼은 저렇게 점핑하다 탈나는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뛰어다녔다. 그런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왜 음악에 열중을 못하고 데이먼의 체력 문제를 걱정하고 있는 건가! 공연을 볼 때마다 백퍼센트 몰입력을 발휘했던 내가 흔들리고 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의 팬이라면 이런 반응이 정상인 걸까?

시시때때로 생수병을 흔들며 관중에게 물을 뿌리는 데이먼의 팬서비스(?)는 변함 없었다. 앞쪽에 있던 관계로 계속 물세례를 맞았다. 안경에 묻은 물을 닦아내며 투덜댔지만, 20여년 전 정동에서 데이먼이 똑 같이 물을 뿌려댔을 땐 그 물이 성수라도 된 양 앞다투어 맞으려 했던 나였다. ‘데이먼이 뿌려준 물을 맞았다’고 일기장에도 썼던 기억이 난다. 공연하는 이의 퍼포먼스 일거수 일투족이 중요했던 시간이었다.

옆에 서있던 99퍼센트 너드가 분명한 청년은 안경을 벗더니 눈물을 훔쳤다. 나도 너무 반가운 마음에 잠시 울컥했지만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이상하다. 왜 공연장에서 감정이 절제가 되지? 나답지 않다. 2015년 블러 공연을 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1996년 정동 극장의 나를 떠올리며 잠시 혼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때 나와 지금 내가 같은 사람이 맞나?

1997년 어느 날 학교 앞을 지나다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블러 내한 공연? 진짜야?!” 한물 간 밴드가 내한공연을 드문드문 오는 공연 후진국에 살면서 뮤직비디오 카페에서 죽때리며 영상으로만 글래스톤베리와 롤라팔루자를 경험하고 있던 20대 청춘들에겐 엄청나게 충격적인 뉴스였다. 동시대 양인들이 함께 즐기고 있는 동시대 청춘 밴드가 온다니, 이게 농담인가 아닌가. 벽에 몇 개씩 붙어있는 공연 홍보 포스터를 소장하겠다고 조심스레 떼어내며(죄송합니다) 빚을 내서라도 공연을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돈 없는 20대가 감당하기엔 무리인 가격이었으나(아마 5~6만원 정도였던 듯) 밥 몇 번 건너뛰고 사고 싶은 옷을 안 사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예매를 끝낸 나와 친구의 그 다음 계획은 노래 가사를 모두 출력해 관사 하나까지 외우는 일이었다. 이런 국제적으로 핫한 밴드를 맞이해본 적이 없는 두 팬은 열정적인 팬심을 표현하기 위해 대한민국 학생들의 필살기인 암기력을 기댔다. 셋리스트가 뭔지도 몰랐고 그런 걸 알려주는 사이트도 없었다.그저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를 되도록 많이 불러주길 바랄 뿐이었다.

공연 당일에도 뭐를 해야 할지 몰라 조금 일찍 정동체육관으로 갔다. 덕수궁 옆 정동길에 위치한 작은 체육관이었다. 이미 BLUR 로고 티셔츠를 맞춰 입은 분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팬클럽 내지 동호회에 전혀 관심 없었던 우리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승용차가 공연장 입구를 가로지를 때 한 언니가 “블러다!”라며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공연장에 들어가니 무대 뒤편으로 거대한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블러 공연을 보기 전에 국민의례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말없이 무대로 올라온 블러는 정말 한마디도 안하며 들고 있던 생수만 관중에게 뿌려댔다.초반부터 미쳐버린 우리 둘은 데이먼 알반이 뿌리는 물을 맞으며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췄다. 중반쯤 지났을까. 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누군가 사람들에 밀리는 척하며 자신을 가슴을 노골적으로 만졌다고 했다. 성추행의 충격에 빠진 친구는 공연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기다렸던 블러 공연인데 누가 이렇게 망쳐버린 걸까? 성추행범을 찾아서 경찰서에 신고하러 가자고 했다. 친구는 얼굴을 못 봤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흥이 깨진 우리는 떠나기도 아쉬워서 뒷편으로 멀찍이 물러나 남은 공연을 감상했다.

그 성추행범은 자신이 1997년 블러 공연을 봤다며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닐까? 네 덕분의 내 친구에게 이 블러 공연은 기억하기 싫은 날이 되었다.블러의 이름에 먹칠을 한, 성추행 팬은 누구인가.블러에 대한 우리의 기억에 그늘을 만들어준 그 새끼는 누구였을까.

정신을 차리고 다시 2015년으로 돌아왔다. 청춘의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는 옆에 없고 나는 홀로 블러를 마주하고 있다. 반가움과 흥분, 아련함이 혼재된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여 무대를 바라본다. 반가움이 주된 감정이긴 하다. 정동을 거점으로 블러 노래들과 동거동락했던 기억의 무게에 지지 앉으려고 신곡들에 집중한다. 눈물을 참고 있는 감정에 가깝다.그나마 감정을 추스릴 수 있던 이유는 지금 그들이 연주하는 곡들이 추억의 곡들이 아니라 몇 번밖에 못 들어본 신곡들이란 점이다. 앨범으로만 들었을 때는 젊은 블러 시절보다 생동감은 부족했고, 가사는 과도하게 모호해서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늙은 티가 나는 앨범이었는데 라이브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카메라가 녹화를 하고 있어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랜만에 블러로 무대에 선 그들이 ‘블러식 라이브’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마음이 컸다고 믿고 싶다. 에너제틱하면서도 노련한 연주. 각각의 응집력이 돋보이는 곡들.

파편화된 이미지를 이어 붙인 듯한 가사의 ‘Pyongyang’ 정도가 갑자기 착 가라앉는 분위기를 유도해 가장 튀었다. 도시 ‘평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곡. ‘Ong Ong’은 즉석 싱어롱을 유도하기 위해 동요같이 만든 곡임이 티가 나서 조금 민망하긴 했으나 결국은 따라 부르고 말았다.신기한 반응 중 하나는, 뒤에 있던 또 다른 어린 소년이 곡이 나올 때마다 곡명을 친구에게 말해 줬다는 것. 블러는 “아직 불편해서 부르기 힘들다”는 ‘Ice cream song’ 등을 제외하고 신곡을 거의 들려준 후 무대를 떠났다. 떠난 그들에게 앵콜을 요청하는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뉴욕 최고로 수줍음 많은 음덕들만 모였나. 이 정도 목소리의 앵콜 요청이라니 블러에게 미안하지 않은가!(남을 대신해서 창피해하고 미안해하는 한국병은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 어쨌든 녹화용 각본이 있어서인지 블러는 다시 등장했다. 데이먼은 너무 행복해하며 각 멤버들을 하나씩 껴안았다. 두근거리는 관중들에게 들리는 익숙한 전주. Beetlebum이다. 조용했던 사람들은 아는 노래가 나오자 하나둘 미치기 시작. 신곡명을 다 외웠던 뒤쪽 청년은 이 틈을 놓칠세라 “이건 비틀범인데 블러 명곡 중에 하나”라며 친구를 위한 주석을 달았다. ‘Trouble in the message centre’에 이어 대미를 장식한 ‘Song 2’까지. 간만에 공연장에서 애들이 넋을 잃고 발광하는 걸 목격했다. 부딪히는 아이들에게 질세라 나도 부딪혀가며 가사를 외치면서 다시 한번 울 것 같은 기분이 됐다.

‘Song 2’를 들으며 뮤직바에서나 클럽에서나 미쳐 날뛰던 때가 많았건만, 지금 이순간은 이상하게 완전 몰입이 힘겨웠다. 내가 ‘Song 2’를 좋아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서 당황스러웠다. 동시대 밴드 공연을 적절한 시점에 본 뒤 나이 들어 다시 보게 되면 이런 부작용이 생기는 건가? 음악은 안 늙었는데 나는 늙은 기분. 음악과 20대의 나는 어느 시점에 같이 뭉쳐져 있는데, 그걸 내가 되돌아보고 있는 기분. 시간의 습격에 갑자기 막 슬퍼지고 울고 싶고 그런데 그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잘 판단이 안 되는 혼란스러운 기분.

공연이 끝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이런 대화가 들려왔다.

“너한테 예매전쟁 치르게 해서 미안했어.”

“아냐. 네가 그러라고 해서 너무 행복한 걸.이 공연은 정말 엄청났어.”

풋. 아니야. 애들아. 이들의 정말 엄청난 공연은 이미 90년대에 벌어졌어.블러는 이런 코딱지만한 공연장이 아니라 거대한 글래스톤베리에서 수만명을 넉아웃시켰던 밴드라고. 어디서 감히 에픽이라고 떠드는 거야. 팬심인지 꼰대심인지 모를 이런 나의 반응이란.

오랜만에 블러로 공연으로 끝까지 달리고 싶어하는 데이먼 알반을 보며, 그리고 그 요구에 맞춰주지 못하는 어정쩡한 관객 반응을 보며, 인생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적절한 공연을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과 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 중요한 순간을 망쳤던 성추행범을 다시 한 번 저주하며.

또한 한때 에픽이었던 중년 밴드도 새 시대를 맞이해 정말 열심히 해야 살아남는다는 교훈.

그러므로 나 따위도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 디너쇼는 머리와 마음을 비우고 싱어롱을 하겠다는 자세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블러의 뉴욕 공식 투어가 잡힌다면 96년에 못 따라 부른 노래들을 다 불러야지.

[weiv] 몇 살까지 뮤직 페스티벌에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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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의 청춘들이 진흙을 뒤집어 써가며 ‘록페스티벌’이라는 것에 미쳐 있을 때, 한반도의 심드렁한 청춘들은 학교 축제에나 찾아오는 가수들을 향해 일괄적인 박수를 치는 게 ‘축제’의 전부인 줄 알았다. 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의 여파로 말도 안 되는 ‘록페스티벌’이 급조되긴 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포천의 어떤 공터에 국내 헤비메탈 밴드들 공연을 보러 갔던, 거짓말 같은 기억도 있으니 말이다.(이동 막걸리를 마셨겠지, 아마도) 그런 우리에게 1999년 ‘트라이포트 록페스티벌’은 인식의 전환을 불러일으킨 대사건이었다. 동시대 록밴드 공연을 볼 일이 거의 불가능했던 그 시절, 레이지 어겐스트 머쉰과 프로디지를 함께 볼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으나 그 원대할 뻔 했던 역사는 폭우 속에 휩쓸려 버렸다. 남아도는 기운에 비해 록밴드 내한 공연은 가뭄에 콩 나듯 이루어졌기에, 기다리다 지친 나와 친구들은 12개월 할부를 결의(!)하고 바다 건너 후지록 페스티벌 원정에 나섰다.콜드플레이, 푸 파이터스, 팻보이슬림, 뉴오더 등 훌륭한 라인업과 쾌적한 분위기로 대감동을 안겨줬던 그 때의 후지록 페스티벌은 내 마음 속 록페의 스탠다드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나서 2006년부터 한국에 대형 록페스티벌 문화가 시작되었고, 한국인이면 대개 그러하듯, 그 동안 참았던 음악사랑+본전을 뽑겠다는 마음으로 록페 입시공부하듯 록페를 돌았다. 인천이든, 지산이든, 난지도든, 올림픽 공원이든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었다. 초심은 이렇듯 열정만발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에너지는 사그라 들었다. 언제부턴가 나의 자리는 앞쪽 펜스에서 점점 밀려나 돗자리 깔고 보는 뒤쪽으로 이동했다. 서 있기보단 앉아 있거나 누워 있었다. 행사장에서 파는 싸구려 음식과 술에 대한 불만도 커져서 먹거리를 직접 챙기다 보니 짐도 늘어났다. 밴드 라인업보다 주차공간 혹은 대중교통의 편의성에 대한 정보가 더 중요해지고, 음악도 모른 채 패션만 요란하게 하고 등장하는 멋부림 소년소녀들에 대한 투덜거림도 늘어갔다. 날은 왜 이렇게 덥지? 에어컨 나오는 데 없나? 갑자기 비는 왜 쏟아지지? 집밖에 나와서 이게 뭔 고생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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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늙어가고 있다가 뉴욕에 왔더니 이 동네는 수십 명의 뮤지션들이 참가하는 음악 페스티벌이 없다. 임대료와 인건비가 비싼 동네라서 계획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대신 수많은 단독공연을 즐기느라 돈이 줄줄 새어 나갔다. 여름엔 큰 공원이나 특별한 공연 장소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공연들을 묶어 ‘페스티벌’이라 불리는 행사가 많았다. 그러나 경험해왔던 페스티벌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 페스티벌 갈증을 달랠만한 행사는 2011년부터 맨하탄과 퀸즈 사이에 위치한 ‘랜달스 아일랜스’란 작은 섬에서 열리고 있는 ‘거버너스볼 뮤직 페스티벌’이다. 초창기에는 1일 페스티벌이었다. 벡, 모디스트 마우스, 패션 핏 등 당시의 핫한 뮤지션들의 이름이 올라왔으나 센트럴 파크에서 몇 개 밴드 모아놓고 하는 여느 공연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마음은 언제나 캘리포니아의 코첼라나 시카고의 롤라팔루자로 향하곤 했다. 무릇 뮤직 페스티벌이라고 한다면 저 정도 스케일은 되야 하지 않겠는가. 영국 글래스톤베리가 일본 후지산보다 가까워졌지만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유튜브 중계나 보며 대리 만족이나 하는 신세였지만.

다행히도 ‘거버너스볼’이 미국 전역의 뮤직 페스티벌 붐과 함께 급격히 성장해 작년부터 미국 동부의 자존심을 지킬만한 헤드라이너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올해는 잭 화이트, 뱀파이어 위켄드, 스트록스, 아웃캐스트, 데이먼 알반, 스푼, 인터폴, 스키릴렉스, 제임스 블레이크, 피닉스 등 웬만한 페스티벌이 부럽지 않은 라인업을 선보였다. 행사 기간은 무려 2박 3일! 가격은 250달러! 그리하여 나는 3일권 두 장을 3개월 할부 옵션으로 구매해 4년만에 뮤직페스티벌이라 할 수 있는 행사에 나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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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버너스볼은 뮤직페스티벌치곤 제한이 많았다. 일단 섬 내부의 공원이 공연장이어서 숙박이 불가능했다. 심지어 자동차를 주차할 공간도 없었다. 돈 들여 페스티벌 셔틀버스를 타거나 30분 넘게 자동차 매연을 들이키며 섬을 잇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 위치였다. 더 황당한 건 이 페스티벌이 11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밤낮으로 음악에 취해 노는 게 아니라, 신데렐라라도 된 듯 12시가 되면 현실의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고 다음날 또 같은 경로를 거쳐(셔틀버스를 타거나 걷거나) 출근을 해야 하는 이상한 페스티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을 가득 메운 20대 청춘들은 마냥 흥겨워 보였다. 자기네들끼리 너무 흥겨워서 타인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음식 부스에 줄을 서 있으면 새치기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30분을 기다려 먹은 음식은 비싸고 양도 적고 맛도 없었다. 행사장 밖 슈퍼마켓에서 2달러하는 저가 맥주를 10달러 넘게 주고 사서 마치 백 만원 짜리 와인 마시듯 홀짝홀짝 아껴먹어야 하는 상황. 한편, 개나 소나 닭이나 말이나 다 함께 쓰는 간이 화장실 상태는 그 곳을 화장실이라 부르면 진짜 화장실에게 미안해지는 그런 수준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신나 보였다. 함께 간 30대와 40대 음악 동지들은 그나마 얼굴이 동안임에 감사하며 어린이들 틈에 끼어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좋아하는 밴드를 영접하면서 최대한 즐겁게 즐기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이동하며 시야를 방해하고 사방에서 어젯밤 일을 떠들어대도, 참고, 참고, 또 참으며 말이다. 그리고 이틀째가 되던 날, 누군가가 말했다. “뮤직 페스티벌은 올해가 마지막일 것 같아.” 다른 이들도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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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상태보다 더 난처했던 부분은 따로 있다. 공연을 고를 때마다 내가 한 물 간 인간처럼 느껴졌다. 미국 유명한 페스티벌 라인업에 비하면 다소 부족하지만 그래도 2014년 음악 흐름을 반영한 라인업이었다. 스케줄의 구도는 명확했다. 록음악 대 EDM. 잭 화이트 vs. 스키릴렉스, 네코 케이스 vs. 라 루, 티비 온 더 라디오 vs. 그라임스, 바스티유 vs. 와쉬드 아웃, 브로큰 벨스 vs. 디스클로저, 인터폴 vs. 엠파이어 오브 더 선, 뱀파이어 위켄드 vs. 악스웰&잉그로소(스웨디시 하우스 마피아) 등등. 간간히 힙합 대 록의 구도도 있었다. 저넬 모내 vs. the 1975, 스트록스 vs. 차일디쉬 감비노, 프랭크 터너 vs. 얼 스웨트셔트, 더 헤드 앤드 더 하트 vs. 제이 콜, 그리고 아웃캐스트 vs. 데이먼 알반.

매 시간이 힘든 결정이었다. 이건 마치 청자의 음악 취향이 얼마나 동시대적이고 선구적인지 판정하는 시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EDM의 시대를 살고 있으나 마음이 동하는 건 함께 성장해온 록밴드들이었고 우리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팽팽한 접전이었다. 올해의 빅이슈인 아웃캐스트의 재결합 무대를 보려다가 인파에 밀려 데이먼 알반이 외롭게 연주 중인 무대로 발길을 돌리던 순간,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었다. 엄청나게 후진 이번 앨범 곡들을 데이번 알반의 얼굴만 보며 꾹 참고 들었다. 그러다 시카고의 젊은 래퍼와 드 라 소울이 깜짝 등장해 알반과 고릴라즈의 몇 곡을 불러주자 금세 행복해졌다. 맙소사, 내가 원하는 건 디너쇼인가.

다음날도 스키릴렉스에게 향하는 꼬꼬마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잭 화이트를 영접했고, 그 다음날도 이비자섬의 클럽을 공간 이동시킨 듯한 악스웰&잉그로소 무대를 외면한 채 뱀파이어 위켄드의 ‘옥스포드 콤마’를 따라 불렀다. 그나마 즐겨 들었던 라 루의 공연은 거의 최악이었고, 제임스 블레이크는 음악보다 목소리 큰 관중들 덕분에 감상이 불가능했다. 기대했던 디스클로저는 언더월드 주니어급의 음악으로 기대를 충족시켜줬다. 그래도 스푼이 더 반갑고, 티비 온 더 라디오가 더 멋졌다. 최고를 꼽는다면 잭 화이트다. 어떤 이는 아웃캐스트를, 어떤 이는 스키릴렉스를 말하겠지. 힙한 리스너라면 뱅크스나 다이어리어 플래닛 정도는 언급해줘야 할 것이다. 눈에 띌 만큼 번쩍이는 신인 밴드들을 찾지 못했다. 사실 새로운 밴드를 발견하겠다며(그리고 본전 뽑겠다며) 일찍부터 출근해서 팔짱 끼고 지켜볼 열정 따위는 없었다. 그보다 앉을 자리 찾는 게 더 중요했다. “재네들이 요즘 그 유명한 애들이야? 근데 어디 앉을 데 없나?” 뭐, 이런 대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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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티켓 예매 사이트인 ‘이벤트브라이트(Eventbrite)’는 SNS를 분석해 미국내 뮤직 페스티벌 인기 순위를 매겼다.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SXSW)가 일등을 먹고 롤라팔루자는 4위, 코첼라는 5위를 차지했다. 공연외 놀 거리가 부족한 출퇴근 페스티벌인 거버너스볼은 뉴욕 EDM 페스티벌인 ‘일렉트로닉 주’보다도 훨씬 못한 19위를 차지했다. SNS 이용자들은 17세부터 34세 사이가 75퍼센트를 차지했고 이들은 뮤지션이나 공연보다는 ‘페스티벌 경험’에 대해 주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1999년 못다 본 ‘공연의 한’으로 시작된 나의 록 페스티벌 순례 여정은 페스티벌 자체를 즐기는 지금의 흐름에 완전히 비껴난 셈이었다. 페스티벌 기간 동안 나는 공연 감상 위주로 트위팅했다. 시대에 이렇게 역행할 수가 있나. 페스티발 공기도 달라지고, 메인 장르도 달라지고, 허리도 아프니 뮤직 페스티벌 팬에서 은퇴할 때가 됐나 보다.

이후 3일 정도가 지나고 허리 아픔도 잦아들 무렵, 20대 관중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은 잊히고 공연의 몇 장면들과 음악만 머릿속에 남았다.(치매인가) 그리고 충동적으로 ‘이번엔 감기 걸려서 제대로 못 놀았으니 내년에 제대로 놀아주마’라고 결심한다. 내일 모레가 마흔이지만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개의 ‘죽기 전 봐야 할 밴드’가 남아 있사옵니다. | 홍수경janis.hong@gmail.com

2014.10.06

note. 10년 동안 잡지 기자로 살던 홍수경의 마지막 직장은 [무비위크]였다. 90년대 초중반, 헤비메탈의 성은(聖恩)을 듬뿍 받은 인천과 모던록의 돌풍이 불던 신촌과 홍대 일대에서 청춘을 다 보낸 열혈 음악 키드였는데, 어쩌다 보니 영화잡지 기자로 일했고, 어쩌다 보니 뉴욕에 살고 있다. 외고는 언제나 환영! 개인 블로그(69)는 여기! http://sixty-nine.tistory.com/

 

[weiv] 러프 트레이드에서 얻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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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가장 당혹스러운 음악 트렌드는 바이닐의 부활이다. 20세기 한국에서 ‘롱 플레잉(Long Playing)’의 앞자를 따 ‘엘피(LP)’라 부르던 그 물건이 이제는 한국에서도 뭔가 새로운 발명품인 양 ‘바이닐’로 통용되는 현실. (게다가 외래어로서 정확한 발음은 ‘비닐’인데!)

이 당혹감의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카세트 테이프와 엘피를 지나 CD와 mp3 파일로 음악 저장 방식이 ‘진화’했다고 믿었는데, 갑자기 엘피가 튀어나와 미래가 과거로 유턴해버렸단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천원 주고 엘피를 사 모으던 시절 CD는 만원이 넘어가는 고가품이었다. 그땐 돈이 궁해 CD를 살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기보다 CD의 디지털 사운드가 비인간적이고 차갑고 허전하다며 딴죽을 걸었다. 고가의 앰프와 턴테이블, 스피커를 세트로 구비해놓고 몽크(Monk)의 엘피를 틀어주던 대학 선배 자취방에 앉아서는 ‘아아, 역시 음악은 엘피가 제맛’이라는 식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후 엘피는 매장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를 CD가 차지했다. CD가 대중적인 저장 매체가 되니 어떤 사람들은 같은 디지털 녹음이라도 메이드 인 코리아, 저팬, 유에스에이의 음질이 다르다고 말하며 가격이 1,5배가 넘는 수입반만 사모으기도 했다. 시급 오천원도 안되는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나는 그 고가의 음악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신청곡 잘 틀어주는 신촌이나 홍대의 록카페로 들어가거나, 음반 매장의 세일 품목을 뒤지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mp3 시대가 온 뒤에야 음악 좀 듣겠다며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이때는 또 mp3냐, AAC냐, FLAC이냐 아니면 다시 CD냐를 따지는 음질 혹은 선호도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자, 이게 웬 할아버지 육이오 전쟁담같은 옛날 이야기인가 싶을지 모른다. 풀이하자면, 이런 퀴퀴한 냄새나는 사연의 아줌마가 어쩌다가 뉴욕에 갔는데 하필 엘피가 대유행이었고, 그래서 옛 친구를 만난 반가운 마음에 엘피나 좀 사볼까 했더니 웬걸, 그 가격은 CD보다 훨씬 비싸더라는 얘기랄까… 게다가 힙스터 교양 목록 같은 고가의 빈티지 콜렉션을 보면, 그야말로 내가 한때 어떻게든 아등바등 모았다가 이사하느라 처분할 수밖에 없던 엘피들의 목록과 일치할 때의 그 난감함! 마치 싸게 팔아치운 부동산 시세가 열배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는 땅주인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팔아먹을 땅이 있으면 정말 좋겠네) 더불어 1세대 아이팟으로 처음 음악을 들었을 것 같은 20대 아이들이 ‘내추럴 사운드 운운’하면서 엘피를 사 모으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이 비비꼬인 꼰대 게이지가 더불어 무한 상승하는 것이다. 아이리버(!)도 아니고 아이팟 따위의 그 후진 음질로 음악듣던 아이들이 ‘내추럴 사운드’에 대해 뭘 안다는 말이더냐! (삐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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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전문가가 아니라서 엘피의 사운드가 실제로 CD보다 따뜻하고 풍부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날의 향수 때문인지 더 인간적인 것 같은 사운드였다고는 기억한다. 물론 아날로그냐 디지털이냐의 그 우열은 끝나지 않는 논쟁과 같아서 작년에는 피치포크에 ‘정말 바이닐 사운드가 더 나은가?’란 글도 올라온 적이 있다. 엘피 사운드가 더 낫다는 증거는 사실 상 없으며, 같은 CD와 똑같은 마스터 음원으로 엘피를 제작한다는 의혹도 있고, 무엇보다 감상자들의 선호는 주관적일 수 있다는 게 저 글을 쓴 필자의 주장이다. ‘그래, 엘피 수집가들에게 꿀릴 이유는 없어!(불끈)’하는 마음으로 (소위 힙스터 상점이라 불리는) 얼반 아웃피터스에 쌓인 크로즐리 턴테이블을 향해 ‘훗, 허세 같으니…’라고 비웃는 이 비뚤어진 마음이여. 여기까지, 요약하자면, 과거의 바이닐이 알고보니 인류역사상 최상의 사운드여서 부활했나 싶었는데, 정작 ‘내추럴 사운드’를 찾는 유행에 가깝다는 걸 알고 난 뒤에 안도감에 빠져 ‘자칫 구렁텅이처럼 빠져들었을 지도 모를’ 경제적 낭비와 압박으로부터 다행히 벗어났다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한 번 더 내 안의 바이닐 버튼이 눌린 건, 지난 4월 셋째주 토요일에 열린 ‘레코드 스토어 데이’를 맞아 브룩클린의 음반 가게 ‘러프 트레이드’를 찾았을 때였다. 1970년대 영국 펑크 음악 씬을 이끌었다는 런던의 음반 가게 ‘러프 트레이드’가 지난해 말, 브룩클린 윌리엄스버그에 뉴욕 분점을 냈다. 컨테이너 박스를 재활용한 내부 구조는 쿨하기 이를 테 없고, 정갈하게 정리된 수많은 바이닐을 만지작거리노라면 이 곳이 천국인가 싶었다. 심지어 이 레코드 천국은 ‘힙’하기까지 해서 지금 당장 인디 씬에서 주목받고 있는 음악들이 쉴 새 없이 플레이되는 것이다. 워 온드럭스(War on Drugs), 맥 드마르코(Mac DeMarco), 멜트 유어셀프 다운(Melt Yourself Down), 다크사이드(Darkside)처럼 주옥같은 핫 뮤지션들의 음악을 들으며 한가롭게 머무를 수 있는 곳. 하루 종일 있어도 아무도 뭐라 안 하는 곳. 영화 [하이 피델리티](한국어 제목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처럼 음악 마니아들의 대화가 오고가는 게 당연해보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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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꼭 바이닐 때문에 러프 트레이드를 방문한 건아니었다. 현재 이 곳은 음반 가게보다는 옆쪽에 만들어 둔 공연장이 더 유명하다. 인디밴드 중 막 뜨기 시작한 밴드들을 주로 유치하기 때문에 음반팬이라면 공연 리스트를 꼭 점검해둬야 한다. 뿐만아니라 앨범 홍보를 위한 공짜 공연들이 많다. 이 날은 무려 지난 CMJ 뮤직 마라톤및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에서 ‘될성부른 떡잎’ 수준으로 인정받은 노이즈 펑크 밴드 ‘퍼펙트 푸시 Perfect Pussy’의 무료 공연이 잡혀 있었다. 입장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는 동안 한 모범생 타입 커플은 ‘요새 밴드명들이 왜 이러나’라며 각종 이상한 밴드명을 읊어댔고, 메탈계 중년 아저씨는 공연 리스트를 보더니 ‘뭐야! 아는 밴드가 하나도 없잖아!’라며 충격이 담긴 탄성을 내질렀다. 무슨 말이든 음악덕들의 말을 듣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퍼펙트 푸시 공연만 보면 완벽할 하루였으나 잠시 후 스태프가 공연 취소 소식을 알려왔다. 아아 낚였다!

 

그 다음 밴드 피어 오브 맨(Fear of Men)의 공연까지 대기 시간은 약 두 시간. 할 일이 딱히 없으니 매장을 돌아다니며 사지도 않을 바이닐을 구경했다. 매장에는 청취용 CD 플레이어가 사방에 놓여 있었다. 그나마 낯익은 이름은 ‘벡’ 정도였고 거의 처음 듣는 밴드들의 CD가 모여있었다. 방금전 메탈 아저씨의 충격은 남 일이 아니었다. “뭐야! 아는 밴드가 하나도 없잖아!” 그러니까, 아는 밴드가 하나도 없는 게 당연하니, 미리 들어보라고 여기 플레이어가 있는 게 아니겠는가. CD 겉면에는 스태프들이 쓴 짧은 소개글이 붙어있었다. 좋은 음악이길 바라면서 하나하나 감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몇 년 만에 CD를 샀다. 듣고 반한 음악을 남겨두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음반을 살 때의 설레이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꼈다. 옛날옛적 타워레코드, 파워스테이션, 핫트랙스, 뮤직랜드 등의 대형 음반 가게가 득세하던 시절 바구니에 CD를 쓸어담던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났다. 바라던 음반 하나 사는 것만으로도 뿌듯한데 저렇게 왕창 살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여전히 그렇게 쓸어담을 수 없는 처지이나 그다지 불행하진 않았다. CD 한 장, 바이닐 한 장을 사면서 소중해하던 감정이 되살아나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디지털 파일 다운로드만 하다가 어느새 잊힌 감정이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바이닐을 단지 음질 때문에 사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싸지도, 또 아주 비싸지도 않은 그 가격은, 돈을 모아서 꼭 사고 말겠다는 구매 의지를 자극할 만한 정도다. 바꿔 말해, 내가 20세기에 경험했던 그 주술같은 음악 소비의 방법이 지금도 유효한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자 ‘어린이들의 허세’라며 코웃음치던 꼰대의 마음은 금방 부서졌다. 좋아하는 음반을 손에 딱 쥐었을 때의 그 기분이 얼마나 애틋하고 소중한지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게 아무리 개인의 사소한 판타지라고 해도, 괜히 뽕맞은 것처럼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니까. 물론 나는 앞으로도 바이닐을 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걸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행이다. (물론 ‘컷 앤 페이스트’ 작업을 위한 바이닐 구매는 논외로 합니다요…) | 홍수경 janis.hong@gmail.com

 

note. 10년 동안 잡지 기자로 살던 홍수경의 마지막 직장은 [무비위크]였다. 90년대 초중반, 헤비메탈의 성은(聖恩)을 듬뿍 받은 인천과 모던록의 돌풍이 불던 신촌과 홍대 일대에서 청춘을 다 보낸 열혈 음악 키드였는데, 어쩌다 보니 영화잡지 기자로 일했고, 어쩌다 보니 뉴욕에 살고 있다. 외고는 언제나 환영! 개인 블로그(69)는 여기! http://sixty-nine.tistory.com/

 

[weiv] 공연장에서 떠들지 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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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밍 립스(Flaming Lips)의 투어 공연 중

언젠가 음악광인 C모 씨가 ‘라이브 공연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고 말을 해 놀랐던 적이 있다. 음악 좋아하기로는 어디 가도 빠지지 않는 내 동거인 또한 기본 세 시간은 서서 버텨야(!) 하는 라이브 공연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렇듯 음악에 대한 애정이 공연욕과 등치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지인들을 공연에 끌고 가야 할 때면 다소 미안해진다.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지만, 다음 날 기상하자마자 허리가 아프다든가 피곤하다든가 하는 투덜거림이 계속되면 나의 괜한 욕심 때문에 상대에게 폐를 끼친 건 아닌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반면 나란 인간은 음악에 대한 사랑을 라이브 공연을 통해 아낌없이 표현하는 쪽이다. 한국이 공연의 불모지였던 시절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라이브 클럽에 가야 속이 뚫렸다. 해외 뮤지션의 공연이라도 보게 되는 날이면, 공연에 대한 허기를 스크리밍 에너지로 전환해 2시간을 머리가 하얘지도록 소리를 질러야 만족스러웠다. 알게 모르게 많은 민폐를 끼쳤을 것이다. 나 같은 이런 열혈 공연팬 때문에 음악 감상을 하러 왔던 음악팬들이 오히려 공연 거부감을 갖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습니까, C모 씨?)

어쨌든 공연에 굶주린 채로 뉴욕에 도착해 무료 문화정보지 <빌리지 보이스>를 펼치고서 공연 스케줄 짜기에 매진했다. 일주일간 진행되는 공연 리스트만 해도 깨알 같은 글씨로 기본 3~4페이지가 넘어갔다. 수많은 공연들을 체크하고 나니 통장 잔고가 걱정됐다. ‘겨울아, 아무리 네가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공연 봐야지’의 마인드로 산다고 한들 신기하게도 언제나 0원에 수렴하는 통장 잔고였다. ‘본전’에 대한 강박이 여느 민족보다 심한 코리안으로서 어떠한 공연이든 지불한 비용 이상으로 즐기려고 최선을 다하기 마련. 뉴욕물 몇 달 먹은 상황에선,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뉴욕에서 처음 본 공연이었던 플레이밍 립스 투어 때는, 관중들이 “She Doesn’t Use Jelly”를 한목소리로 따라 부르자 역시 ‘미국 밴드를 미국에서 보니 좋구나’ 하며 감격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상이 관광객의 헛된 망상이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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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작은 공연장 보워리 볼룸(Bowery Ball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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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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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분위기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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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wery Ballroom: 도도스(The Dodos)의 공연

몇 년 전 도도스(The Dodos)의 공연을 보던 날이었다. 멜랑콜리한 포크 뮤직을 들려주는 이 샌프란시스코 출신 듀오는 지금도 인디 씬에서 약간의 유명세는 있지만 힙한 밴드는 아니다. 마침 새 앨범을 내고 미국 투어에 나선 시기였지만 워낙 아는 사람이 적은 밴드라 티켓을 구하기는 쉬웠다. 그들 덕에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위치한 작은 공연장 ‘보워리 볼룸’에 처음 가봤다. 일찍 도착했기에 공연장 지하에 있는 바에 들러 맥주를 한잔 마셨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위층에 올라가 앞이 훤히 보이는 괜찮은 자리에 섰다. 공연이 시작되고 백 프로 집중 모드의 오오라를 뿜어내고 있을 때, 옆에서 서 있던 한 무리의 관중이 술에 취해 떠들기 시작했다. 노랫소리가 커질수록 그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술에 취한 웃음소리에 나의 음악 감상이 마구 짓밟히게 되자, 나는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며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누군가의 시야를 가리는 건 아닌지 걱정하느라 음악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야 미국 관중들이 ‘익스큐즈 미’와 함께 어디든 닥치는 대로 밀고 나가는 개매너 소유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아무튼 그때 갓 미국으로 온 나는 한없이 순진한 일개 이민자였던 것이다. ‘보컬 남자 너무 귀엽다’라며 술주정을 부리던 한 여자는 내가 옆으로 자리를 옮길수록 자기 자리가 넓어지기라도 하듯 더 자유롭게 움직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고, 급기야는 손짓 발짓을 하며 광폭하게 웃다가 내 옷에 약간의 맥주를 쏟고 말았다. ‘아임 쏘리’라고 말하는 소녀에게 ‘됐고, 닥치기나 해’라고 응대할 수 없는 나의 소심하고 예의 바른 코리언 마인드여.

이와 같은 공연 중 잡담 불상사는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발생했다. 야외 콘서트인 경우엔 더 심했다. 센트럴 파크로 대망의 M83 공연을 보러 갔던 날, 무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고 온몸으로 M83의 음악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뒤에서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듯한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알아서 멈추겠지 했으나, 이 커플은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M83이든 뭐든 지금은 너의 목소리밖에 안 들린다는 식으로 끊임없이 쫑알댔다. 이것들아, 닥치고 차라리 키스를 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이들 덕분에 몰입에 실패한 순간 사방에서 들려오는 온갖 수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라이브 음악을 바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쯤으로 생각하며 술을 마셔대는 듯했다. 아니, 이것은 공연 대국의 여유로움인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공연이든 볼 수 있는 너희와 오늘 못 보면 언제 보겠냐며 손을 부들부들 떠는 나의 차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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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83의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들 @센트럴 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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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 파크(Central Park)이 섬머 스테이지에서 M83이 열심히 공연 중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미국에선 식당이 아닌 외부에서 술병을 들고 술을 먹는 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허락되는 주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뉴욕은 금지다) 야외 공연에서 술을 마시는 경험은 특별하다. 그나마 이런 경우 가격 바가지가 붙어 한 잔에 8달러가 훌쩍 넘어가니 그나마 많이 마실 수 없어 다행이다. 여느 공연장을 가든 술값은 비싸다. 그래도 기분상 한 잔은 먹어줘야 공연장에 온 기분이 난다. 게다가 뉴요커들은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말이 많은 족속들일 게다. 무뚝뚝한 인상들이지만 어쩌다 말 한번 건네면 신나서 자신의 신상명세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늘어놓는 분들이다.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이젠 약간의 노하우가 생겼다. 몇 개의 단골 공연장도 생겨 시야가 좋은 위치를 쉽게 찾곤 한다. 누군가 비집고 들어와 앞을 가리면 약하게 항의도 할 수 있고, 오히려 내가 나서서 ‘익스큐즈 미’ 하며 인파를 뚫고 지나가기도 한다(모두 그러기 때문에 지나가든 말든 그다지 신경을 안 쓰는 분위기랄까.) 무엇보다 라이브 공연을 완벽하게 감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많이 누그러졌다. 공연이 시작한 뒤에 입장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며 곡 사이사이 친구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소리를 이겨보겠다는 의지로 떠드는 분들은 여전히 용서가 안 된다. 개매너 관중을 퇴치하는 방법을 계속 연구 중이다. | 홍수경 janis.hong@gmail.com

2014.03.10

note. 10년 동안 잡지 기자로 살던 홍수경의 마지막 직장은 [무비위크]였다. 90년대 초중반, 헤비메탈의 성은(聖恩)을 듬뿍 받은 인천과 모던록의 돌풍이 불던 신촌과 홍대 일대에서 청춘을 다 보낸 열혈 음악 키드였는데, 어쩌다 보니 영화잡지 기자로 일했고, 어쩌다 보니 뉴욕에 살고 있다. 외고는 언제나 환영! 개인 블로그(69)는 여기! http://sixty-nine.tistory.com/

[weiv] 아케이드 파이어와 역사적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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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이드 파이어의 뉴욕 부쉬윅 공연 ⓒ NPR Music

미국 땅을 ‘즈려밟는’ 음악팬들이라면 누구나 공연에 대한 원대한 꿈을 품는다. 평생을 꿈꿔왔던 밴드 혹은 뮤지션의 공연을 보는 게 그것이다. 현지에서 가장 주목받는 핫한 뮤지션의 공연을 보는 것 또한 외국 유람에 있어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역사적 사명에 가까운 욕심이 추가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밴드의 ‘전설적인’ 공연을 내가 목격하는 것. 음악사에 있어 아주 중요하게 기억될 어떤 순간의 그 자리에 내가 존재하는 것. 그 욕심을 채워보겠다며 심각한 표정으로 공연 리스트를 살핀다. 이왕 밟은 외국 땅, 빚을 내서라도 꼭 봐야 하는 공연이 있지 않겠는가. 설령 없다 해도,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술자리 화제로 평생 우려먹을 수 있는 공연을 기필코 찾아내고야 말리라!

외국에 나갔다가 내한을 절대 안 할 것 같은 유명 밴드의 공연을 (‘운명’처럼 시간이 맞은 관계로) 봤다는 무용담 하나쯤은 품어줘야 이 세계의 고수인 것이다. 미국하고도 뉴욕에 도착했을 무렵, 매의 눈으로 매주 공연 리스트를 살피던 나도 이런 헛된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공연장에서 산 오리지널 티셔츠를 목이 늘어날 때까지 입어주리라. ‘오리지널’에 대한 허세를 채우기 위해 주식 종목을 꼼꼼히 살피는 개미투자자의 자세로 매일매일 공연 정보를 뒤졌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공연 사진을 올리면 ‘좋아요’가 50개는 기본으로 찍힐 배팅이 필요했다. 언젠가 그 밴드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면 ‘내가 그때 공연을 봤는데’라며 무심한 척 자랑질을 할 만한 공연이어야 했다. 옷 사 입고 술 먹는 돈 아껴서 공연을 보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제대로 지켜지진 않았다. 공연욕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했다. 돈이 생기면 밥이 우선이었다. 나의 욕망은 이다지도 지조가 없었다.

몇 개의 투자성 공연은 있었다. 대외적으로 자랑질을 할 만한 롤링스톤즈 50주년의 화려한 공연도 봤고, 양키즈 구장에서 에미넴과 제이지가 인맥 자랑하는 힙합 한마당도 즐겼으며, 작은 교회당에서 경험한 얀 티에르상의 공연을 보곤 감동에 쩔었다. (에헴!) 이렇듯 내용도 훌륭하면서 으스댈 수 있는, 마트의 ‘원 플러스 원’ 상품 같은 공연을 찾아다니지만 돈은 늘 부족하고 (이전 칼럼에서도 강조했듯) 예매 경쟁은 힘겹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이런 허세스런 팬들의 열망을 알게 된 음반사들이 ‘전설이 될 법한’ 공연을 기획하고 희대의 쇼인 양 몰아가며 마케팅을 하는 추세다. 몇십 달러에 자신의 허세까지 만족시키고자 하는 음악팬들은 호구나 다름없다. 음반사와 매체들이 ‘올해 최고의 앨범’인 듯 분위기를 띄우면, 판단력이 약해진 우리는 부나방처럼 달려들어 예매전선에 나선다. 그 예 중 하나가 작년 아케이드 파이어의 [Reflektor] 발매 기념 깜짝 공연이었다. [The Suburbs]로 그래미상을 수상할 때만 해도 ‘Who is the arcade fire?(whoisarcadefire.tumblr.com)’라는 텀블러 사이트가 생길 정도로 미국 일반 대중들에겐 ‘듣보잡’ 밴드에 가까웠으나, 메이저 음반사가 본격적인 프로모션에 나서자 상황은 역전됐다. ‘공연을 끝내주게 잘하는 이 시대의 마지막 거대 록밴드’ 정도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이들은, 음악을 좀 듣는다면 꼭 알고 있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더구나 뉴욕의 신화인 LCD 사운드시스템의 제임스 머피가 [Reflektor]의 프로듀싱을 맡았으니, 이미 뉴욕에선 게임 끝. 밴드는 앨범이 공개되기도 전에 홍보의 일환으로 소호의 작은 라이브 술집에서 게릴라 무료 공연을 하며 뉴욕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 공연이 또 공중파 TV에서 방영되는 바람에 ‘전설의 공연을 반드시 목격해야만 하는’ 팬들의 역사적 사명감은 더더욱 불타올랐다. 그 열망 때문인지 아니면 쿨한 홍보의 일환인지, 며칠 뒤 아케이드 파이어는 조만간 브루클린에서 또 깜짝 공연을 갖겠다고 트위터를 통해 발표를 했고, 다음 날 그 장소는 윌리엄스버그보다 훨씬 힙한 동네인 부쉬윅으로 정해졌다. 브루클린에서 깜짝쇼라니, 어머, 이건 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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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The Fuck Is Arcade Fire?’ 티셔츠 ⓒ whoisarcadefire.tumblr.com

다음 날 예매가 오픈되자마자 창을 두 개 띄워놓고 마우스 클릭을 수없이 반복하며 예매전을 치른 끝에 나는 한 장의 티켓을 건졌다. 전문 공연장도 아닌 창고를 개조한 갤러리임을 감안하면 비싼 가격이었으나, 역사적 순간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투자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정장 혹은 코스튬으로 제한하는 드레스 코드도 뭔가 있어 보였다. 한없이 부족한 옷장을 뒤지며 그나마 ‘정장’에 가깝게 차려입고 부쉬윅으로 향했다. 힙하다지만 아직은 개발이 덜 되어 거대한 창고 건물들만 몰려 있는 을씨년스러운 거리에 난데없이 칵테일 드레스와 할로윈 코스튬을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브레이킹 배드>의 작업복 코스튬 행렬을 보며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한 날이기도 했다.

제임스 머피의 소개로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케이드 파이어의 공연이 시작됐으나,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 치여 제대로 공연을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맥주를 사는 줄까지 이리저리 뒤엉켜 혼란을 가중시켰다. 아케이드 파이어는 열심히 신곡을 연주했지만 빈약한 사운드로는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감흥을 느낀다 한들 팔 한 번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내부는 찜통이었다. 하이힐을 신고 서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양복을 입고 온 남자들은 참다못해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렀다.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건만 춤을 출 수 없다니, 누가 이런 바보 같은 드레스 코드 아이디어를 내놓은 거지? (그렇잖아도 노엘 갤러거를 비롯해 여러 음악팬들이 아케이드 파이어 [Reflektor] 앨범 발매 공연의 엄한 드레스 코드를 열심히 씹어대고 있었다.) 역사적 순간이든 뭐든 상관없이 빨리 이 공연장을 벗어나고 싶었다. 윈 버틀러가 관중들 사이를 아주 약간 헤집고 다닌 걸 제외하곤 별다른 이벤트도 없었다. “록밴드라면 이런 라이브 공연을 해야 하는 거야!”라는 식의 자화자찬 멘트를 위해 관중을 들러리로 부른 듯했다. 한국에선 볼 수도 없는 아케이드 파이어 공연이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배가 불렀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싶겠지만, 천하의 아케이드 파이어도 급조된 이상한 공연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과도한 기대는 과도한 실망을 낳았다. 그날 공연보다는 나중에 앨범을 통해 들은 음악이 100배는 훌륭했다.

이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역사적 사명 따위는 벗어던지기로 마음먹었다. 뮤지션도 취향도 천차만별인 이 시대에 다수가 우러러볼 만한 전설의 공연이 존재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게다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게 공연을 보는 듯한 뉴욕 관중들과 함께라면, 음, 여기선 절대로 전설적인 공연을 경험할 수 없을 거란 섣부른 생각도 든다. 그렇게 이성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있던 지난 12월, 아케이드 파이어가 2014년 8월 뉴욕 투어 예매 소식을 알려왔다. 당장 내일 술자리도 예측할 수 없는데 8월이 웬 말이냐고 어이없어하는 것도 잠깐, 이미 내 손은 예매 창을 오픈하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전설의 공연이 되지 않을까 하며. 다시 한 번, 나의 욕망은 이다지도 지조가 없다. | 홍수경 janis.hong@gmail.com
note. 10년 동안 잡지 기자로 살던 홍수경의 마지막 직장은 [무비위크]였다. 90년대 초중반, 헤비메탈의 성은(聖恩)을 듬뿍 받은 인천과 모던록의 돌풍이 불던 신촌과 홍대 일대에서 청춘을 다 보낸 열혈 음악 키드였는데, 어쩌다 보니 영화잡지 기자로 일했고, 어쩌다 보니 뉴욕에 살고 있다. 외고는 언제나 환영! 개인 블로그(69)는 여기! http://sixty-nine.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