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서기 극기 훈련, 크로넛 먹기

‘빨리빨리’ 정신으로 유명한 한국인으로서 뉴욕에서 사는데 가장 큰 번거로움이 있다면 ‘줄서기’를 꼽겠다. 조금이라도 싼 슈퍼마켓(대표적으로 Trade Joe’s)에서 물건을 사려면 쇼핑 시간보다 훨씬 긴 계산대 줄을 감내해야하고, 거의 예약을 받지 않는 화제의 일본 라면 가게에서 무언가를 먹으려 하면 1시간을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주토피아>에서 나무늘보들이 직원으로 등장하는 도로교통국 DMV를 갈 일이 생긴다면 대기 시간이 예측불허이기 때문에 하루 휴가를 내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내일 DMV 가야해요.” “저런. 행운을 빌어요.” 뭐, 이런 연민의 대화가 오가는 게 다반사다.  ‘쉐이크색’ 버거를 꼭 먹어야 하는 뉴욕 관광객이면 모르겠으나, 거주민들에게 ‘줄서기’는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일상사다. 특히 밥 빨리 먹기로 유명한 한국인이라면 1시간 기다려서 20분 만에 밥 먹고 나오는 상황이 너무도 시간낭비로 여겨지는 것이다.(너 말이다! 쉐이크색!)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소호에 있는, 딱히 특별한 건 없는데 이상하게 인기는 많은 쿠바 식당 ‘잭스 와이프 프레다 Jack’s Wife Freda’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잠깐 멈칫했다. ‘간만에 줄을 서 볼까’하는 자세로 도착했지만 호스트가 당연하다는 듯이 ‘40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을 때 후회가 솟구쳤다. 그러나 쿨한 뉴욕커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오케이’라 답해야만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다 보니 시간이 훌훌 지나가긴 했지만 대기자들의 줄이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대기 리스트도 없이 대기자의 이름과 얼굴을 외워서 호명하는 호스트의 능력에 감탄하고있을 때, 한 소녀가 와서 물었다. “뉴욕의 식당 줄서기 경험에 대해 조사 중인데 도와 줄래요? 학교 과제를 하는 중이거든요.” 몸이 배배 꼬일 만큼 지루한 줄서기를 하다 보면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반갑기 그지없다. 게다가 즉석 인터뷰라니, 오히려 이쪽에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다. “가장 오래 줄을 섰던 경험을 말해주세요.” 어머나! 질문을 듣자 마자 나는 약간 시큰둥한 어조에, 줄서기 기록이라면 누구라도 이길 수 있을 거란 으쓱거림을 섞어 대답했다. “크로넛 줄이요.” 게임 끝. 크로넛 줄을 이길 수 있는 줄서기는 없다고 99퍼센트 확신한다. 소녀는 눈을 반짝였다. “우와. 몇 시간걸렸어요? 세 시간? 네 시간?” 나는 도넛 하나 먹겠다고 새벽부터 일어나 네 시간을 기다린 사람이다. 존경받아 마땅하다!…

플러싱과 나와 중국 요리

뉴욕 맨하탄에서 7호선을 타고 동쪽 마지막 역에 내리면 ‘플러싱 Flushing’이라는 동네가 나온다. 퀸즈 동쪽이자 한국인 주요 거주 지역으로 한국 슈퍼마켓과 식당들이 즐비하다. 때문에 뉴욕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동네다. 맨하탄 32번가 한인타운이 번쩍이는 자동차의 외관이라면 퀸즈 플러싱은 그 자동차를 움직이는엔진과 같다. 최근엔 뉴욕 옆동네인 뉴저지의 한인타운이 더 기세를 떨치고 있지만 어쨌든 뉴욕 사람들에게 ‘정통’한인타운이란 플러싱을 뜻한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 뉴욕을 막 도착한 여행객이라면 맨하탄이든 퀸즈든 한인타운을 보고 일종의 문화충격을 경험한다. 좋게 말해 10년은 뒤떨어져 있는 듯한 구닥다리 풍경에 난데없이 창피한감정이 앞선다. “외국인들이 보게 될 한국의 이미지가 그렇게 세련되지 못하다니 정말 놀랐다니까. 내가 그 일부로 보일까봐 두려웠어”라며 지인들은 맞장구를 친다. ‘한국=나’로 여겨지는 동일시가 얼마나 심한 지 깨닫게 되는순간이기도 하다.(한국 때문에 왜 내가 창피해하지?) 시간이 흘러 적응이 되면 뉴욕 안에서 자기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이민자들의 노력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게 된다. 그들 덕분에 한국 음식이 그리울때 장을 볼 수 있고, 편하게 들를 수 있는 식당과 상점이 있는 게 아닌가. 뉴욕에 와서 몇 년 간 플러싱에서 살았다. 맨하탄행 전철 및 고속 기차가 다니는 이 동네는 교통 조건에 비해 집세가 싼 편이다. 학교와 일터가 퀸즈였으므로 플러싱을 거주지로 택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봄에 쑥국이나 냉이국이먹고 싶으면 집 앞 슈퍼마켓에서 재료를 사올 수 있는 편리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통신원 일 때문에 가야하는 장소는 보통 맨하탄이거나 브루클린이었다. 인연을 맺은 친구들도 맨하탄 아니면 브루클린에서 살았다. 한번은 브루클린에 사는 친구의 파티에 간 적이 있었다. 퀸즈와 브루클린 사이에 불편한 교통을 감수하고 1시간 반 넘게 걸려 파티에 갔다. 힙한 한국 사람들이 핫한 트렌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 곳에서 누군가 나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플러싱에 살아요”라고 대답하니 더 이상 대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 어디어디한국 식당을 가봤는데 굉장히 멀더라는 정도의 반응이 있긴 했다. 서울 사는 아이들의 서울 위주 대화에 지방에서온 사람이 꼈을 때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의 재스민이 어디서 왔냐는 물음에 “뉴욕”하고 자랑스럽게 “파크 애비뉴”를 덧붙였을 때 심정과 정반대의 기분일 것이다. 브루클린 사람들은 심지어 ‘뉴욕’도 생략하고 아마 ‘브루클린’이라고 대답하겠지. 한인타운을 마주하며 ‘한국=나’로 당혹해했던 나와 달리, 브루클린 거주민들은‘브루클린=나’로 여기며 국가대표 힙스터인 양 자랑스러워할까?…

이케아 소비생활

90년대 걸작 영화 중 하나인 <파이트 클럽> 초반부엔 단정한 회사원인 주인공이 머릿속으로 이케아(미국발음은‘아이키아’이지만) 카탈로그 상품들을 시뮬레이션 하며 가구를 배치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남자의 야수성 부활을위해 노력하는 영화에서 이케아는 집을 상징하며 남자는 그 안에서 가구 배치에 전전긍긍하는 소비사회의 인간으로 길들여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정한 양복과 단정한 헤어스타일, 그리고 집까지 단정하다. 이것이 바로 모던 소비 라이프. 웰컴 투 모던 월드다. <파이트 클럽>예고편. 약 18초경 이케아 카탈로그가 삶에 오버랩되면서 주인공은 ‘나를 한 인간으로 정의해줄 식탁세트’를 고민한다. <500일의 썸머>에서 이케아는 데이트 장소가 된다. 집처럼 꾸며진 쇼룸을 오가며 주인공들은 마치 연극을 하듯집에 있는 듯한 흉내를 낸다. 한 침대에 같이 누워 꺄르르 웃어대며 지금과 같은 미래를 꿈꿔보지만 알 수 없다.시즌이 바뀌고 새상품이 나오면 이케아의 쇼룸은 또 변할 것이고 그들이 누웠던 침대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사랑의 기억도 사랑이 머물렀던 공간도 함께 사라진다. 그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