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잡아주기 문화

뉴욕에 온 뒤 여러가지 문화적 충격을 느껴봤지만 그 중 하나가 문 잡아주는 문화다. 그게 더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미국 애들이 공공 장소에서 타인에 대한 (한국식) ‘배려’ 개념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타인이 문 앞에 올 때까지 문을 잡아주는 것에 대해선 굉장히 민감해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상점을 들어가거나 나갈 때 문을 잡게 되는 상황이라면, 바로 뒤에서 따라오거나 앞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가 지나갈 때까지 문을 잡아주는 게 예의다. 근데 그거 말고는 또 딱히 여기 애들 행동거지상 (한국식) ‘예의’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 뭐, 상류층 쪽은 다를 수도 있겠으나 서민들이 의도치 않게 부비부비하며 살아가는 공간에서는 몸이 스치기만 해도 ‘아임 쏘리’라고 해야하는 등 주로 사과할 일이 많지 남 배려해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데 다른 건 다 남 눈치를 봐도 문 잡아 주는 예의는 없었던 강북스톼일 코리아에서 온 나는 이 문 잡기 매너를 익히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대개는 누가 문잡아 주면 ‘땡큐’하고 지나가는 게 대다수고 내가 문을 잡아 주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누군가 같이 들어가거나 나가면 문을 잡아주고 감사 인사를 받곤 한다. 한국 가서 눈 앞에서 문이 쾅 닫힌다면, 음, 그래도 뿌리가 코리아니 적응은 되겠지 싶다. 잠깐 한국에서 영어마을 직원으로 일했던 지인은 미국 애들이 모여서 주로 한국 사람 흉보는 내용이 “문 안 잡아주다니 미개인” 이런 거였다고 한다. 아놔, 니네 지하철에서 냄새 풍기며 스파게티 먹고 피자 먹는 건 어쩔 거야. 새치기도 잘 하고 틈만 나면 짐짓 모른척 남이 맡은 자리 넘어오는 주제에! 우린 문 잡아주는 문화 없다고! 바쁘다고! 알아서 밀고 가라고! 오래된 후진 건물에서 일하느라 자동문도 못 본 촌 것들아!(마음의 소리입니다)
사건은 몇 주 전 아파트 현관에서 벌어졌다. 뒤따라 오는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아파트 문을 닫히게 놔뒀더니 문 뒤에서 “땡큐 베리마치”라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성난 소리가 들렸다. 의도가 아니었으므로 “쏘리”라고 했는데 애가 못 들은 모양인지 문을 나서자 마자 “예의를 배워야 한다”는 둥 큰소리로 미친듯이 화를 내는 것이었다. 사실 이 분이 얼마전에 이사와서 온갖 이웃들 보고 방긋방긋 웃으며 인사 남발하고 다니던 분이라 더 충격. 그 분의 발광에 놀란 우리는 “너 오는지 몰랐고 미안하다고 했지 않느냐”고 같이 외쳐댔다. 그러더니 혼자 좀 뻘줌해졌는지 “그랬어? 그렇다면 미안해”하고 돌아서 가는 게 아닌가.
갑자기 서글퍼져서 하루 동안 시무룩했다가 뭐 이런저런 일도 있고 해서 잊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려는데 앞에 문 닫고 먼저 들어간 여자가 나를 발견하곤 “아임 쏘리’를 과도하게 반복하며 다시 문을 열어줘서 ‘아 진짜. 문 잡아 주는데 목숨 거는구나’라고 한 번 더 느끼게 됐다.
그런데 오늘 집에 들어오다가 개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윗단락의 그 청년을 만났다. 누군지도 몰랐는데 그가 갑자기 아는 체를 하더니 “내가 그동안 마음이 너무 불편했어. 정말 마음 깊이 사과해. 정말 정말 미안해.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전에도 쓰레기 버리러 갈 때 누가 문을 쾅 닫아서. 정말 미안해. 오해해서 미안하고. 실수였는데 내가 심했어.” 이러면서 갑자기 왕사과 모드. 뭐야. 이거. 왜 이래. 애? 뭐 잘못 먹었어?
미국인에게 갑작스럽게 이렇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기는 처음이라 리액션을 잠깐 고민. 감동받은 모드로 “괜찮아. 고마워 사과해줘서.” 이 정도로 대처했다. 애네는 정말 사과도 열심히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뉴욕이 아닌 어딘가 정겨운 시골 마을 출신인가 하는 추측도 하게 되고. 덕분에 ‘문 잡아 주는’ 버튼이 리셋되어 정말 요즘에 문 열심히 잡아주고 있다. 한국 수퍼 가면 대부분이 안 잡아주는데 그때마다 ‘예의 말아먹었음?’ 그런 미국인 마인드가 되기도 한다.
스페인에 갔던 미국 선생이 “문을 안 잡아줘!”라며 유럽인들 태도에 멘붕하며 말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도 문은 안 잡아줬던 것같다. 내가 다닌 나라 중에 문 잡아주는 것에 신경쓰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다. 근데 미국 애들은 문 잡아주는 게 세계인의 교양인양 믿고 있잖아! 이것들아 미국 밖으로 좀 나가봣!
그러니까 미국에 오면 공공장소에서 불법이 아닌 한 무엇을 하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공공 도덕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문은 꼭 잡아줘야 한다. 아시아인이 다른 예절을 아무리 지켜봤자 애네 눈엔 이상한 강박관념처럼 보일 뿐, 열 개를 아무리 잘 해도 문 한 번 안 잡아주면 교양없고 예의없는 아시아인들로 찍힘. 문잡아줘봤자 ‘땡큐’ 한마디 없이 얌체처럼 잽싸게 들어가버리는 아시아인들도 많다. 이런 건 아시아인들의 스테레오 타입이 된지도 오래인 것같다. 처음 관광 온 한국 분들은 애가 왜 문을 잡아주나, 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절대 당신이 미인이라서가 아니야!)
경험해 보니 문 잡아 주는 문화는 상대방이 나를 도와준다는 긍정적인 환상을 안겨주는 효과가 있다. 모르는 사람이 친절을 베푸니 세상은 살만하다고 믿게된달까. 물론 문잡아주는 걸 당연시 여기고 ‘땡큐’란 말도 없이 지나가버리는 싸가지 분들을 만나면 그런 조그만 희망마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지만.

201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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